5.18 역사기행을 다녀와서
광주, 세 번째 만남
글쓰기회 회원이 된 지는 꽤 오래 됐지만 연수회에는 새내기 교사 때 두 번 다녀온 뒤 가지 못했다. 이번에 십여 년 만에 연수회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그 동안 글쓰기 교육에 소홀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니 자격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교직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부터 교사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채찍질을 해준 선생님들이 모인 곳이 글쓰기회여서 미안한 마음도 덜고 글쓰기 공부도 앞으로 더 열심히 해보자는 뜻에서 연수회에 가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은 어렵게 가게 되었는데 글쓰기 공부도 좋았지만 이튿날 오후에 5.18 역사기행까지 덤으로 하게 되어 정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광주를 떠올리면 뭔지 모를 빚이 느껴지는 건 비단 나뿐이 아닐 것이다. 80년대에 젊음을 맞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게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다. 여느 대학 새내기처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전혀 없는 풋내기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입시에만 목을 매달고 살아온 내가 정치나 경제, 사회 문제에 관하여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학생회관에 들어서자 눈을 의심케 하는 사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민들과 군인들이 맞보고 대치하는 사진, 군인들이 시민들을 때리는 사진, 숨을 거둔 시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복도를 메우고 있었다. 특히 비참하게 죽어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 광주항쟁 사진전이었다.
이런 일이 올림픽이 열리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정말 일어났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선배들은 불과 8년 전에 광주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고 강조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함께 본 누구는 조작된 사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짓말 같았던 것들이 진실로 눈앞에 다가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여러 선배들의 입에서, 자료집이나 서점의 책에서 광주의 진실과 대한민국의 당혹스런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이었지만 서서히 내 안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새삼 중학교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1984년 늦은 봄 어느 날 나를 비롯한 우리는 3학년 모두는 학교에서 지시한 대로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까닭인즉슨 고등학생들과 ‘용호놀이’를 하라는 것이었다. ‘용호놀이’는 차전놀이와 비슷한 고장의 민속놀이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우리였기에 모두들 당황스러웠지만 시키는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용과 범으로 나누어 무거운 줄머리(동채)를 어깨에 메고 고등학생들이 연주하는 풍물 장단에 맞춰 춤을 추거나 앞뒤로 움직이다가 맞붙도록 하는 노릇을 하였다.
한 달 가까이 연습을 하고 첫 공연을 하러 간 곳이 바로 광주였다. 그 곳에는 ‘남도화합체전’이 열리고 있었다. 체전에 앞서 경상도의 민속놀이와 전라도의 민속놀이를 차례로 공연하도록 하였는데 우리가 그 부분을 맡은 것이다. 공부에 대한 부담은 있었지만 고장을 대표해서 먼 곳까지 가서 공연을 한다는 자부심이 은근히 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참고 공연을 하고 돌아왔다.
돌아보니 이것이 나와 광주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광주의 불편한 진실을 덮기 위해 정부에서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화가 났다. ‘남도화합’이란 이름이 가증스러웠던 것은 물론이고 그런 정치색 짙은 행사를 다른 곳도 아닌 광주에서 했다는 것이 역겨웠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갔지만 잠시라도 ‘가해자’의 편에 서 있었다는 것에 속이 상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즈음에 다시 광주에 가게 되었다. 전교조가 합법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지역 교사모임에 참여했는데 방학 때가 되면 교육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여행을 떠났다.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도 가 보고 앞선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도 가 보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좋은 선생님들도 만나던 좋은 여행이었다. 망월동 묘역과 무등산을 찾은 것이 그 때다.
책 속에서, 노래 가사에서, 몰래 보던 비디오 화면에서만 보았던 낱말들인 망월동과 금남로, 무등산을 직접 보고 나니 전에 느꼈던 어렴풋한 분노가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현실이 성큼 내 앞에 다가선 것 같았다. 마음이 떨렸고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가해자인 ‘그들’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삶을 어떻게 꾸려 가느냐에 따라서 언제라도 가해자 편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민주정부 아래서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고 5.18 묘역이 국립묘지로 격상되는 변화가 있었다.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를 7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기도 했다. 이번 기행에서는 떨림과 두려움이 아니라 편안하고 희망찬 광주의 모습을 느껴보고 싶었다.
연수회 둘째 날 오후 일정이 모두 5.18 체험활동이었다. 일정과 해설을 모두 5.18 기념재단에서 맡아주었고, 계획에 없던 전세버스를 글쓰기회에서 대절해주어서 질 좋고 편안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체험은 망월동 묘역에서 시작해 새 묘역과 도청, 상무대공원을 둘러오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망월동 구 묘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 한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햇살과 지열이 버무러져 피어나는 묘역에 서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지만 재단에서 나오신 해설사님은 아랑곳 않고 이 곳 저 곳 둘러보게 하며 정성껏 이야기해주었다. 글쓰기회 회원들도 흐트러짐 없이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옛 묘역에서 5.18의 정신을 느꼈다면 오솔길 따라 이어진 새 묘역에서는 법과 제도로 다듬은 단정한 형식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이렇게 크고 딱딱하게 만든 묘역이 껍데기가 아니냐고 말했지만 형식도 사물을 이루는 본질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옛 묘역과 새 묘역과 오솔길로 이어놓은 것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옛 전남도청이었다. 5.18 때 시민군으로 도청에 있었다는 해설사님 덕분에 사진과 영화로만 보았던 도청 겉과 속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바깥벽에 칠한 흰색 페인트가 듬성듬성 벗겨져서 붉은 벽돌이 드러나긴 했지만 일제시대에 지었다는 본관 겉모습은 아직 멀쩡했다. 말을 들어보니 원래 바깥벽이 붉은 벽돌이었는데 5.18 이후에 흰 색 페인트칠을 두텁게 했다고 한다.
좁은 계단을 올라 옥상까지 가면서 그 곳을 오르내렸을 시민군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내다보았을 문과 창살, 계엄군을 피해 뛰어갔을 좁은 복도, 그들의 손때가 묻었을 듯한 두터운 계단 난간을 바라보며 그들이 품었을 희망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옥상에 올라 금남로를 바라보았다. 분수대와 금남로, 광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는 차분하게 물을 내뿜고 있었고, 그를 둘러싼 도로에는 차들이 드문드문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광주의 중심지라는 금남로에는 우뚝 선 빌딩 없이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사진 속 예전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도시의 중심지라고 하기엔 너무 한산한 풍경이었다. 무언가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듯 쓸쓸함마저 느껴졌다. 이 곳이 과연 민주주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민주화의 성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청을 나서면서 말없이 도청을 지키고 있는 300년 묵은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잔가지를 많이 잃어버리고 굵은 본줄기만 듬성듬성 남은 데다 그 굵은 밑둥과 본줄기마저 빈속을 시멘트로 채우고 있었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망월동 새 묘역에서 해설사님이 한 말을 떠올렸다.
“5.18 묘역이 이렇게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단장이 되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직 해결해야 할 게 너무나 많습니다.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 명예회복도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5.18 때 계엄군에게 연행된 사람들이 폭도취급을 당하며 갇혀있었다는 상무대였다. 그 곳에 온 사람들은 계엄군들이 집, 사무실, 학교, 학원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와 가둘 때 끌려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갇혔던 영창에 들어가 보니 일제시대 악명 높았던 서대문 형무소보다 더 한 것 같았다. 그 좁은 공간에 수백 명을 잡아놓고 폭도취급을 하고, 시민들은 굶주림에 구타에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야 했을 것 같았다. 앞서 간 사람들의 이런 아픔 덕에 오늘 날 이만큼의 민주주의라도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기행은 모두 끝이 났다. 글쓰기 공부만 하기에도 빠듯한 일정 속에 이렇게 역사기행까지 넣어서 진행한 글쓰기회에 무척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장소가 광주여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이 많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민주주의는 세울 때는 힘겹고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며 느낀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보며 십 년 전에 느꼈던 떨림과 두려움을 다시금 느낄 때가 많다. 그래서 광주가 더욱 쓸쓸해보였던 건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2009.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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