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라 사촌들과 조카들이 다 모였다. 늘 그렇듯 멀리 떨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그 동안 못나눴던 이야기꽃이 핀다.
제사가 끝나고 남자들 몇 명이 마당 한켠에 모였다. 사촌 형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동생 학교에는 남선생이 얼마나 되노?"
형님은 나만 보면 언제나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묻곤 한다.
"육십 명 중에 여덟 명 정도 됩니더."
"그거 밖에 안되나? 완전 꽃밭이네?"
학교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남자교사 비율을 이야기하면 늘 이런 반응이 나온다.
"꽃밭이면 뭐합니꺼. 우리 학년에는 남자가 혼자밖에 없는데. 여자들 속에서 지내는 것도 힘듭니더."
"뭐가 힘드노? 부럽기만 하구만."
오십대 초반인 형님은 대구에 있는 염색 공단에서 일하신다. 형님 회사에는 남자 동료들 뿐이라고 했다.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여자들하고 살아보이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할 때가 많습니더."
"하긴 집에 있으면 너거 형수하고도 대화가 안될 때가 많지. 그건 그렇고 아가씨 선생님들도 있나?"
"아가씨 많지요. 우리 학년 아홉 반 중에 다섯 반이 아가씨지요."
"그라마 학교 갈 맛 나겠네. 아가씨들하고 지내면 얼매나 재미있겠노."
형님은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아주버님, 저 사람이 학교갈 때 옷에 얼마나 신경을 쓴다고요. 젊어보일라고요."
언제 나타났는지 아내가 곁을 지나가면서 형님을 거들었다.
"참 나, 말이 안나오네. 내가 언제 젊어보일라고 신경썼노. 그냥 단정하게 하려는 거지."
"어이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소. 솔직히 아가씨들한테 잘 보일려고 그러는 거 아니오?"
‘여우같은 마누라’라는 말은 이럴 때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 형님 학년 여자들은 평균연령이 서른 살 밖에 안되겠네."
여태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사촌 동생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나? 뭐 그 정도 되겠네. 어쨋든 젊은 여자들하고 같이 있다고 내가 젊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좋은 점도 많다. 남자 한 명만 더 있어도 남자끼리 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말이야."
"형님은 배부른 소리 고마하소. 나도 꽃밭에서 일하기는 하는데..."
동생은 시골에서 청량고추 농사를 짓는다. 규모가 크다 보니 일손이 모자라서 동네 할머니들을 품삯을 주고 고용한다.
"완전히 할미꽃밭이지. 나는 평균 칠십 정도 되겠네."
동생 말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시골에 있는 일꾼이라야 일흔 넘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나는 맨날 할매들 앞에서 혼자서 재롱떨어야 되는데, 생각해보소. 얼마나 힘든지.”
동생의 너스레에 우리는 다시 한참을 웃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테두리를 벗어나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농사짓는 동생이 한 수 가르쳐주었다. (2008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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