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금요일 구름 없이 맑고 오후로 갈수록 싸늘해짐.
장수 나팔꽃
내일 김해시 평생학습축제가 있어서 우리 교실을 비롯해 열 개 교실을 빌려준다는 연락이 왔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지만 시민들이 교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니 청소나 교실환경에 눈길이 갔다.
교실을 대략 둘러보니 청소는 평소에 하던 대로 하고 가득 찬 재활용상자만 비우면 될 것 같았다. 게시판도 날짜 지난 아이들 글 몇 편 외에는 특별히 손볼 곳이 없었다. 그 밖에 특별히 거슬리는 곳은 없는데 창가에 있는 늙은 나팔꽃 여섯 그루가 마음에 걸렸다.
예전의 푸름을 잃고 누렇게 변한 잎을 듬성듬성 달고 있는 우리의 나팔꽃. 시든 원줄기 아래에서 키 작은 새 줄기가 나와 지난주 까지도 고운 자줏빛 꽃을 하나씩 피우더니 이번 주 들어서는 그마저도 힘든 듯 시들어 늘어진 꽃잎만 몇 군데 매달고 있다. 시민들이 저런 초라한 나팔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잠깐 생각에 빠졌다. 이 기회에 내다버릴까. 다른 반은 여름 방학 전에 이미 내다 버리지 않았나. 안 그래도 재배상자에 배추를 심자는 옆 반 선생님 말을 듣고 고민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사실 우리 반도 여름방학 전에 나팔꽃을 버렸다. 여름방학을 맞아 교실에 있던 식물을 정리할 때 우리 반은 재배상자를 그대로 두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한가지라는 생각에 저절로 말라죽게 할 참이었다. 그리고 방학에 들어갔다. 당연히 나팔꽃은 잊었다.
한 동안 바쁜 일정을 보내고 방학한 지 약 일주일 만에 학교에 들렀다. 교실에 올라갔더니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나팔꽃이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닌가. 잎도 줄기도 모두 늘어지고 줄기도 연한 연둣빛으로 변했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세상에! 무덥고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온실 같은 교실에서 물도 없이 일주일이나 살아있다는 게 신기했다. 물 없는 사막에서 낙타가 등에 보관해둔 지방을 녹여 쓰듯 나팔꽃도 제 몸 속에 있던 수분을 조금씩 써가며 생명을 잇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서 물을 부어주었다. 그러나 다음은 약속할 수 없었다. 당분간 학교에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열흘 쯤 뒤 다시 학교에 들렀다. 마찬가지로 교실에 올라갔더니 놀랍게도 나팔꽃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축 늘어진 줄기와 잎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색만 바랬을 뿐 마른 흔적은 없었다. 전에 부어준 물을 용케도 아끼고 아껴 쓴 모양이었다.
나팔꽃은 그렇게 목숨을 이어갔다.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와서 선심 쓰듯 찔끔찔끔 물만 주고 가는 비정한 주인을 탓하지 않고 말없이 제 자신을 녹여가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 의지한 채 타는 목마름을 이겨내고 용케도 살아남은 우리의 나팔꽃. 잎이 떨어지고 꽃을 피우지 못해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나팔꽃은 어릴 때부터 아픔이 있었다. 녀석들이 태어난 곳은 우리 반이 아니라 옆 반이다. 거기서 태어나 지난 4월 초에 모종을 솎아낼 때 우리 반으로 건너왔다. 다시 말하면 옆 반에 남은 굵고 튼튼한 놈들 보다 약하고 힘이 없어서 밀려왔다.
얻어온 녀석들을 재배 상자 두 곳에 각각 세 그루씩 심어서 창가에 두었더니 잘 자랐다. 약해서 밀려온 녀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쑥쑥 키가 크더니 보름도 안 돼서 천장까지 머리를 밀어 올렸다.
무명실 따라 칭칭 감은 줄기에 심장(하트) 모양의 푸른 잎들을 그득히 매달아 싱그러움도 선물해주고 끊임없이 어여쁜 자줏빛 꽃을 피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던 녀석들. 아무런 표정도 움직임도 없이 붙어서 날이 갈수록 색만 바래는 종이 잎들과 달리 녀석들은 날마다 표정을 달리하며 삭막한 교실에서 살아있는 자연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런 고마움을 잊고 녀석들을 말려 죽이려고 했으니 그 죄를 어떻게 다 감당할까.
개학 하고 부지런히 물을 준 덕에 다시 예전의 푸름을 되찾은 나팔꽃이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목숨을 다투는 어려움 속에서도 어떻게 맺어놓았는지 소담스런 씨앗주머니들을 여기저기 매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나하나 따 모으니 우리 반 모든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가고도 몇 개 더 남아서 내년에 심으려고 모아두었다.
씨앗주머니를 본 아이들은 양파 같다고도 하고 마늘 같기도 하다며 신기해했다. 또 톡 터트려서 나온 까만 씨앗을 보고는 초콜릿을 닮았다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아이들은 필통에, 주머니에 씨앗들을 넣어갔다. 서러움만 받은 나팔꽃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친구로 다가온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오후에 교실에 남은 아이들한테 물어보았다.
“규리야, 저 나팔꽃 이제 보기 싫제? 버려도 되겠나?”
“안돼요. 생명이 끈끈하잖아요.”
“태현이는 어떻게 생각해?”
“〈병태와 콩 이야기〉몰라요? 언제까지 사나 봐요.”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니 더는 버릴까 말까로 고민할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꽃을 피우지 않아도, 잎 떨어져 초라해 보여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두고 봐야겠다. 그러면 ‘늙은 나팔꽃’이 아니라 ‘장수 나팔꽃’으로 이름도 바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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