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금요일 황사가 옅게 낀 맑은 날
스승의 날 파티
“선생님, 내일은 일찍 오시면 안 돼요.”
“9시 넘어서 출근하세요.”
“학교에 오더라도 교실로 오지 말고 오래 오래 있다가 오세요.”
어제부터 이런 저런 요구를 하던 아이들이 기어이 일을 냈다. 아침에 학교에 들어서는데 서쪽 현관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나오더니 절대로 교실에 들어오면 안 된다며 밀어냈다. 중앙현관에도 아이들 둘이 눈빛을 번뜩이며 길을 막고 있었다.
학교에 오면 교실이 곧 내 집이요 방이요 거실인데 곳곳에 경찰(?)을 풀어서 얼씬도 못 하게 하니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 사택 옆 화장실에 가서 급하지도 않은 볼일도 보고 아침에는 잘 들르지도 않는 교무실에도 일부러 들렀다가 경찰들 눈을 피해서 겨우겨우 4층에 있는 전담실로 갔다. 전담실은 일주일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곳인데 아침부터 와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있으니 영어선생님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하세요?”
“교실에 뭐 하나 봐. 아이들이 못 오게 하네.”
무슨 행사를 얼마나 알차게 하는지 요란스럽게 준비하는 소리가 계단과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문제지 펴 놓고 조용히 학업성취도 평가 공부하는 6학년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영어선생님 둘이 수업하러 간 뒤에도 갈 곳 없는 이방인처럼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전원이 꺼져있는 게 아닌가. 그럼 그렇지. 이때쯤이면 분명히 무슨 연락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 이상하다 했다. 그제야 살금살금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준비물 갖다 주러 오신 미경이 어머니와 얼굴이 마주쳤다.
“어디 계셨어요? 아이들 선생님 모시러 1층으로 내려갔는데. 전화도 안 된다고 하고.”
“길이 엇갈렸네요. 4층 전담실에서 기다렸는데 휴대폰이 꺼져있지 뭡니까. 궁금해서 내려왔습니다.”
곧 1층으로 내려갔던 아이들이 돌아오고 굳게 닫혀 있던 교실 문이 열렸다. 한 걸음 발을 들였더니 문 앞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풍선과 색종이 조각을 날렸다. 수없는 풍선이 내 얼굴과 몸으로 날아들고 머리와 어깨 위에는 갖가지 색깔의 색종이 조각이 쌓였다.
탁자 위에는 롤케익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촛불이 빛나고 있었다. 내가 칠판 앞에 서자 바이올린 한 명(미경), 노래 한 명(현정)으로 구성된 미니 오케스트라가 축가를 연주하고 노래했다. 흔히 볼 수 없는 귀하고 아름다운 음악회였다. 감동이 밀려왔다.
스승의 날을 맞아 파티를 준비한다는 건 이미 눈치를 보며 알고 있었지만 초등학교 4학년이 뭘 얼마나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준비하면서 서로 우당탕탕 왁자지껄 거리며 어울리는 것도 학교생활의 재미려니 하고 모른 체 하고 있었는데 준비한 것을 보니 보통이 아니라 프로급 아이들이었다.
“아침 7시 반부터 준비했다구요.”
“이 롤케익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줄 아세요?”
스스로 행사를 준비하고 치렀으니 그 뿌듯함이 얼마나 컸을까. 서로 공을 내세우는 아이들을 보니 아무런 보답도 준비 못한 게 정말 미안했다.
“얘들아, 스승의 날이라고 멋진 파티 준비해줘서 너무 고마워. 감동이 컸어. 너희들의 그 아름다운 마음에는 못 미치겠지만 앞으로 더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노력할게.”
[덧붙임]
이 소식을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여러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멋진 행사를 준비해준 여러분들 덕분에 칭찬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올린 내용과 댓글을 소개합니다.
이정호 초등 4학년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얘들이 준비한 스승의 날 파티를 보고 깜짝 놀랐다. 교실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풍선 폭탄을 날리더니 미니 음악회까지…. 덕분에 기분 좋아져서 어린이날 보다 신나게 놀았다.
Gi Eun Kim 애들 정말 귀여워요♥ 저희가 쫌 더 귀여웠던 것 같지만;
김수지 사랑스럽네요♥ 저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쌤 보고 싶어요. 곧 찾아뵐께요^^
이정호 그래 고맙다. 미니 음악회 원조는 수지 너희 때였지. 그 때 전담 선생님들도 모셔서 정말 뜻깊은 스승의 날을 만들었는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음악 선생님은 지난해에 운명을 달리하셨다.
김수지 아 그러셨구나, 벌써 그만큼 시간이 흐르고 우리도 많이 컸다고 생각하니까 그때가 많이 그립고 슬퍼지네요. 그래도 이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쌤이랑 애들이랑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날이 다가오니 설레어요^^
김후석 쌤 기대하세요 ㅋㅋㅋㅋ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ㅋ
공재윤 애들 너무 이뻐요♥♥♥♥♥
장흥국 아..스승의날이 일요일이구나. 아무튼 축하한다. 정호야 늘 좋은 선생님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태석 훌륭한 친구, 늘 좋은 선생의 모습으로 기억되어기쁘다. 축하해!
강경선 멋진 선생에 멋진 제자들이네. 오늘 정호는 참 좋았겠다. 곁에 있는 훌륭하신 선배, 후배 덕분에 그래도 감사하고 배울 수 있는 날인 것 같다. 주위의 좋은 스승님들 다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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