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선생님
"선생님 이름이 뭐에요?"
"나이는 몇 살이에요?"
운동장에서 시업식 할 때 까지만 해도 내 눈치만 보고 있던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질문을 쏟아냈다.
"비밀이야."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름도, 나이도 비밀이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장가는 갔어요?"
"그것도 비밀이야."
아이들은 험한 인상을 짓고 서 있는 키다리 선생님 앞에서 전혀 주눅들지 않았다.
"선생님 이씨야."
"맞어. 홈페이지에서 봤어."
"'정'자도 있었어. 우리 엄마가 그랬어."
"아까 새로오신 선생님 소개할 때 나왔어."
아이들은 어제, 그제 기억과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퍼즐맞추기에 들어갔다.
"선생님 이씨 맞죠?"
앞자리에 앉은 똘망이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더 물러설 자리가 없었다. 더 숨기려다간 내 이름은 아무 조건없이 '이정호'가 될 판이다.
"좋아. 선생님 이름부터 말하지. 내 이름에 '이'자도 있고 '정'자도 있어. 잘 봤어. 하지만 내 성은 '별'씨야. 그리고 이름은 열세 글자야."
아이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이름이 어떻게 열세 글자가 돼요?"
"성이 '별'이 어딨어요!"
여기저기서 콧방귀 섞인 질문이 터져나왔다.
"너희들이 못믿겠지만 선생님은 사실 먼 별에서 왔단다. 내가 살던 별은 안드로메다 은하에 있지. 지구에서 우주선 타고 200만년 동안 달려가야 하는 곳이야."
나는 칠판 한 쪽에 동그란 지구와 금병초등학교를 그렸다. 그리고 칠판 반대편에 안드로메다 은하와 별 하나를 그리고 그 사이에 '200만년'이라고 썼다.
"우와, 200년이래!"
"아냐. 200만년이야."
아이들은 200년과 200만 년을 구분하지 못했다. 200년이든 200만 년이든 꼬물꼬물 2학년들에겐 큰 수가 분명했다.
"그럼 선생님 나이는 몇 살이에요? 200살이에요?"
"아니, 그보다 작아. 선생님은 안드로메다에 있을 때 20년 살았어. 그리고 지구에 와서 25년을 살았어. 그러니까 45살이야."
"근데 200년 동안 우주선 타고 왔다고 했잖아요."
"우주선이 엄청 빨라서 200만 년 동안은 나이를 먹지 않아."
우리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갔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이 궁금하지 않니?"
"궁금해요!"
"칠판에 쓸 테니 놀라지 마."
나는 칠판에 커다란 글씨로
'별에서온그대어린왕자이정호'
라고 썼다. 아이들은 이름을 보고 깔깔거렸다.
"봐, 성이 '별'씨 맞지? 그리고 이름이 모두 몇 글자인지 세어볼까?"
능청맞은 표정으로 내가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붙이며 글자 수를 세어가자 아이들도 이구동성으로 숫자를 합창했다.
"여덟, 아홉, ..... , 열두울, 열세엣!"
아이들은 이제야 실감이 난다는 듯 눈빛이 진지해졌다.
"근데 이름이 왜 이렇게 길어요?"
"선생님 별에는 이름이 모두 길어. 열 글자도 있고 스무 글자도 있어. 제일 긴 사람은 백오십 글자도 있는 걸."
"우와! 그럼 이름 부르기도 힘들겠다."
"그럼. 내 이름은 부르기 좋은 편이야. 근데 지구로 와서 한국에 살면서 끝에 세 글자만 써. 한국 사람들은 보통 세 글자 이름을 쓰잖아."
"아하, 그래서 이정호 선생님이네요."
나는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불이 붙었다.
"근데요, 나이가 45살인데 왜 어린왕자에요?"
"음..그건 말야. 우리 별에서는 보통 이백 살까지 살아. 그러니까 마흔 다섯 살은 나이가 어린 편이야."
"선생님 아빠는 왕이에요?"
"그럼, 왕이니까 내가 왕자지."
"엄마는 왕비겠네요."
"그렇지."
질문은 끝이 없었다. 이 쯤에서 막지 않으면 하루 내내 질문하고 답하다가 하루를 마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 이제 질문은 안 받겠어요. 대신 하고 싶은 질문을 내일 학교 올 때 쪽지에 써오면 답해줄게요."
그러자 한 녀석은 질문이 이백 개가 넘는다며 어떻게 다 적어오냐고 투덜거렸렸다.
"앞으로 여러 분들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청소도 잘 하면 선생님 별에서 있었던 일이랑 지구에서 겪었던 일을 하나씩 들려줄거에요. 오늘은 지구에 처음 왔을 때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게요. 잘 들어보세요."
앞으로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더는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처음 지구에 내린 곳은..."
"미국이에요?"
"아니에요. 여기서 가까운 밀양이에요. (밀양은 내 고향이다) 아주 산골짜기였는데 마침 우주선이 내린 곳에 이만한 소나무가 가득했어요. 우주선이 내리자 소나무는 부러졌는데 다행히 우리는 하나도 다치지 않고 지구에 내렸어요."
"밀양은 가깝잖아요. 가 봐도 돼요?"
"네. 시간 나면 가 봐도 됩니다."
"그 우주선 지금도 있어요?"
"아니오. 내가 내리고 나서 또 볼 일이 있어서 갔어요. 자, 자꾸 질문하지 말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세요."
아이들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교실이 조용해졌다. 뒤를 돌아보던 아이도, 짝지랑 손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모두 눈길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어제 읽어둔 <서정오의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내가 마을로 내려오고 있는데 어떤 부잣집 영감이 벼낫가리를 쌓아두고 내기를 벌이고 있는거에요. 근데 사람들 말로는 한 사람도 그 영감님한테 못 이겼다는 거에요. 내기에서 이기면 벼낫가리를 모두 가져갈 수 있는데, 못 이기면 돈 백만원을 내놓아야 했다고 해요. 영감하고 내기를 한 사람은 모두 돈을 잃었다지 뭐에요. 그래서 어떤 내기를 했는지 물어보니까 영감님이 내기하러 온 사람 이름을 열 번 부를 동안에 벼낫가리를 돌아오면 이기는 거고 못 돌아오면 지는 거래요. 예를 들어 내기 하러 온 사람이 김개똥이라고 해요. 그럼 영감님이 김개똥, 김개똥, 김개똥 이렇게 열 번 부를 동안 낫가리를 돌아와야 해요."
여기서 배우를 한 명 불러냈다. 처음부터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본희를 불러내어 이름을 부르는 동안 창가에 있는 책상을 둘러오라고 했다. 본희가 돌아오기 전에 내가 이름을 열 번 부르자 아이들이 아쉬운 탄식을 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하자고 했지요. 내 이름을 물어보길래 '별에서온그대어린왕자이정호'라고 얘기했더니 영감님이 이름이 왜 그렇게 기냐고 하는 거예요. 내가 원래 이름이 길다고 하니까 영감님이 얼굴을 찌푸렸어요. 영감님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기를 하자고 했어요."
다시 본희를 불러내어 아까 했던 방법대로 책상을 돌아오게 하고 나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세 번 정도 불렀을 때 본희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영감님한테 이겼어요. 나는 약속대로 벼낫가리를 모두 받았어요. 근데 별에서 온 나한테 벼가 무슨 필요있나요? 나는 지금은 밥도 잘 먹지만 그 때는 지구 음식을 못 먹었거든요. 그래서 벼 낫가리를 모두 내기하다 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지요."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학년들은 마음이 모두 행동이나 표정으로 드러난다.
"어때요? 재미있지요? 아까 약속한 것처럼 앞으로도 별에서 있었던 일, 지구에서 겪었던 일을 들여줄거에요. 단, 여러분들이 공부도 잘 하고 청소도 잘 하고 약속도 잘 지켜야지요. 할 수 있겠지요?"
아이들은 우렁차게 "네!"하고 대답했다. 일단 대답해놓고 보자는 뜻이렸다! 나는 시계를 보며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근데 지금부터는 '별에서온그대어린왕자이정호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너무 길잖아요. 그냥 한국에서 부르는대로 마지막 세 글자만 불러요. '이정호선생님' 이렇게요."
(20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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