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3월 21일 - 꼬물이들에게 우유먹이기

늙은어린왕자 2014. 9. 23. 17:46

꼬물꼬물 꼬물이들에게 우유먹이기

 


#첫째 시간
그제 하지 못한 빈우유곽 추첨을 하려고 첫째 시간 들어갈 무렵에 우유상자를 책상 위에 올렸다. 꼬물이들은 도대체 선생님이 뭘 하려고 저러시나 하는 표정으로 살폈다.
"이거 어제 우유 상자지? 헹, 근데 먹은 사람이 절반 밖에 안 되네?"
내 입에서 야단이라도 나오려나 싶었는지 꼬물이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꼬물이들이 내 '액션'에 속아 넘어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먹은 사람이 적을 때 추첨하면 효과가 더 큰 법!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며 상자 안에 팔을 넣었다.
"어디 보자."
상자 안에서 팔을 휘젓고 있으니 꼬물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찾아요?"
"물건 잃어버렸어요?"
꼬물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우유곽 찾으려고."
뜬금없는 내 대답에 꼬물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힘들게 찾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빈 우유곽 하나를 들어올렸다.
"휴~ 드디어 찾았다. 흠, 몇 번이지? 그렇지 28번 성웅이네?"
성웅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뒀던 초콜릿을 하나 꺼내주자 성웅이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나와서 초콜릿을 받아갔다. 
"오늘부터 빈 우유곽 추첨해서 이렇게 선물을 줄 거야."
꼬물이들은 눈치가 빨랐다. 이제 선생님이 뭘 하려는지 알아챈 꼬물이들은 우왕좌왕 할 말을 쏟아냈다.
"아, 나는 번호 안 썼는데."
"저는 가방에 넣어갔단 말이예요."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우유곽을 하나 꺼냈다. 이번에는 24번 다빈이가 당첨됐다. 다빈이도 초콜릿을 받아갔다.
꼬물이들은 폭발했다.
"이런 게 어딨어요?"
"미리 말했어야죠."
나는 능청맞게 받았다.
"오늘부터 이렇게 할 테니까 우유 잘 먹어! 그리고 꼭 번호를 써야 돼.“
당첨되지 못한 꼬물이들은 입이 쏙 나왔다.

 

#쉬는 시간
과연 우유곽 추첨 그리고 선물주기 작전이 효과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꼬물이들이 반응을 보였다.
"쉬는 시간에 우유 먹어도 돼요?"
평소에는 먹으라고 사정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준민이는 조바심이 났다.
"오늘 우유도 뽑을 거예요?"
아정이도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거 좀 열어주세요."
손가락 힘이 야물지 못한 서진이와 세연이는 우유곽을 열어달라며 들고 왔다.
"우유 먹고 번호 적으면 나중에 뽑는대. 아까 뽑았잖아.“
예진이는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민재한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꼬물이들 손에는 딱지나 쌓기 나무 대신 우유가 들려있었다. 온 교실이 마치 우유마시기 새마을 운동이라도 일어난 듯 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우유 상자를 보니 대부분 다 마시고 달랑 세 개 남았다. 하나는 내 것이고, 하나는 우유를 마시면 속이 거북하다던 나연이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결석한 지영이 우유이니 전부 다 마신 것이다. 초콜릿의 힘은 정말 강했다.
초콜릿에 눈먼(?) 꼬물이들을 놀려볼까 싶어 나도 우유를 하나 집어들었다.
"너희들만 추첨해서 초콜릿 먹는 거 보니까 배 아픈걸? 나도 우유 마시고 추첨해야지."
꼬물이들은 난리가 났다.
"안 돼요!“
“선생님 번호 없잖아요.”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졌다.
"왜 내 번호가 없어. 난 1004번이야. 별나라 천사니까."
내가 빈 우유곽을 넣으려고 하자 몇몇 꼬물이들이 몸으로 막아섰다. 희은이, 준민이, 나연이, 성웅이는 아예 우유상자 위에 눌러 앉아 틈을 없앴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서진이는 내 우유곽을 집어 들더니 책상 깊숙한 곳에 던져 넣었다.
"선생님은 절대 안 돼요!“
결사항전이 따로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내 꺼는 추첨 안 할게."
꼬물이들은 기어이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서야 자리로 들어갔다.
"선생님, 매일매일 추첨할거죠?"
아정이는 확인까지 하고서야 돌아섰다.
초콜릿 하나에 홀딱 넘어간 아이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먹기 싫어하는 우유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먹여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오늘부터는 우유 때문에 잔소리 좀 줄겠다. (3월 21일)

 

*이 날 이후 교실에는 안 먹고 돌아다니는 우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