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3월 19일 - 실패한 우유 경품 추첨 작전

늙은어린왕자 2014. 9. 23. 17:43

실패한 우유 경품 추첨 작전

 

 

아이들은 우유를 참 싫어한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 반, 우리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아마 전국의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우유 먹이는 문제로 고민하지 싶다.

 

이렇게 '안 팔리는' 우유지만 학교 급식에 포함되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수 있을 지 고민하게 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아이들이 남긴 우유가 골칫덩어리 음식쓰레기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어제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다른 학교 선생님이 아주 솔깃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아이들이 우유를 거의 모두 먹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도 옆 반에서 하는 것을 보고 그 방법을 써봤는데 거짓말처럼 우유를 다 먹었다고 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우유를 먹은 뒤 빈 우유곽에 번호를 써서 내게 하고, 우유상자를 가져가기 전에 경품 추첨 하듯 빈 우유곽 하나를 꺼내어 번호가 당첨된 아이에게 초콜릿 같은 간단한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경품을 받고 싶은 마음에 배가 아프거나 우유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들 외에는 대부분 우유를 먹는다고 한다.

 

선물 비용은 좀 들어가지만 잔소리 하지 않고도 상자에 빈 우유곽이 꽉 차면 이 보다 기분 좋은 일이 있을까? 나도 당장 이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마침 어제 홈플러스에서 사 둔 초콜릿도 있으니 준비는 다 된 셈이다.

 

아침에 우유 당번을 확인해보니 지수와 서진이다. 둘은 학교에 오자마자 1층으로 내려가 우유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가 무겁다며 나영이가 도와주었다.
 
그런데 오늘이 수요일이라 상자 안에는 요구르트만 가득 들어있었다. 우유와 달리 요구르트는 먹지 말라고 해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음료'다. 어떨 땐 다른 사람 몰래 두 개씩 먹는 아이가 있어서 모자라기도 한다. 추첨이 효과가 있으려면 먹기 싫어하는 우유가 들어있어야 하는데 안타까웠다. 작전이 실패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은 1교시부터 요구르트 언제 먹냐고 보챘다. 그리고 요구르트를 먹고는  잔소리를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빈 요구르트병을 상자에 쏙쏙 넣었다. 우유 먹을 때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추첨하는 장면이라도 보여줄까 싶어서 번호를 써서 내게 했다. 오늘 추첨 장면을 보면 분명히 내일 우유 먹을 때 기억할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드디어 4교시, 준비한 초콜릿을 확인하고 우유 상자를 찾았다. 그런데 늘 탁자 옆에 있던 우유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얘들아, 우유 상자 어디갔니?"


놀란 눈으로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아이들은 아무 일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번이 갖다놓았잖아요."


나는 '어, 그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당번이 점심 시간에 우유상자 갖다놓기로 한 건 내가 정한 규칙이지. 그런데 그 일을 오늘 당번 지수와 서진이가 했고, 모든 게 정상이다.

 

아이들은 각자 하던 그림그리기를 하고 있는데 작전 쓰려고 했던 나만 머쓱한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성실한 당번들 때문에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이전 당번들이 성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우유가 나올 때는 상자에 안 먹은  우유가 가득 들어 있어서 제 때 가져가지 못한 것 뿐이다.

 

어쨌든 오늘은 실패했지만 이 작전은 언제라도, 하루라도 빨리 써보고 싶다. 만약 성공하면 앞으로 계속 써야겠지. (2014.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