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아침 시간
출근길, 3층 복도에 들어서는데 동혁이가 쪼르르 달려온다.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선생님, 학교 오는 길에 이거 주웠어요."
천 원짜리 종이돈이다.
"주인 찾아주라고? 알았다."
동혁이는 좋은 일 한 가지 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교실로 들어간다.
가끔 동혁이처럼 등굣길, 하굣길에 주워오는 돈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학교 밖에서 주워 온 돈은 처리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저번에 세은이가 중학교 앞에서 주웠다는 천 원짜리도 아직 책상에 그대로 있다.
예전 학교에서는 이런 돈 모아뒀다가 학급에 필요한 물건을 더러 사기도 했다. 뭐, 아무도 몰래 나 혼자 떡볶이를 사 먹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번 천 원과 오늘 천 원을 함께 두고 쓸 곳을 알아봐야겠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역시 기다렸다는 듯 도은이가 통장을 내민다. 오늘은 저축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돈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오늘은 내게도 행운이 오려는 징조인가? 실없는 상상을 하고 있으니 무성이, 민채, 동혁이, 희은이도 잇따라 저금을 가져온다. 세은이는 통장 없이 오천 원만 쑥 내민다. 통장을 잃어버렸단다. 통장 만들어달라는 메모를 쓰고 돈과 함께 클립으로 찝어놓고 컴퓨터를 켠다.
저금을 받고 나니 이번에는 화장지를 든 아이들이 줄줄 나온다. 어제 가져오지 않은 아이들이다. 바쁘게 기록지에 체크하고 뒷편 책꽂이 위에 쌓아두도록 한다. 책꽂이 위에는 어제, 오늘 가져온 화장지가 두둑하게 쌓였다. 내일모레쯤 문구점에 가서 새 화장지 걸이 하나 사서 걸어둬야겠다고 생각한다.
"저는 어제 가져왔어요. 어디 봐요."
서진이가 자기는 어제 화장지 가져왔다며 일부러 확인까지 시킨다. 안 가져왔다고 야단칠 일도 아닌데, 그래도 떳떳하다는 것을 선생님한테 밝히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그리고 저는 그림그리기 조사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이야? 내가 조사를 시켰니?"
"옆 동에 우리 할머니 사셔요."
아하, 오늘 통합 시간에 친척과 있었던 일을 그리기로 했지. 그런데 옆 동에 할머니가 산다는 건 뭘까?
"할머니 집에서 밥 먹었던 일 그릴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 집에서 밥 먹었던 경험을 그릴 생각인데, 할머니가 바로 옆 동에 사니까 굳이 조사하러 갈 필요 없이 그리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다른 친구들도 기억만 떠올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녀석은 할머니가 옆 동에 산다는 것도 선생님한테 말해주고 싶은 거다. 내가 이해하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도 기분 좋게 물러난다.
재웅이는 교실에 들어서서 자리로 가지 않고 바로 내 책상으로 다가온다. 서진이와 내가 이야기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재웅이를 보니 할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녀석을 두 팔로 감싸안으며 내가 먼저 말을 건다.
"재웅아, 오늘부터는 활동할 때 '안 해요.', '싫어요.' 이런 말 하면 안 된다."
장난끼 많은 재웅이는 어제 강당 활동할 때 같이 하지 않겠다고 몇 번 떼 쓰다가 한 소리 들었다.
재웅이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수줍게 대답한다.
"오늘부터 안 할 거예요."
재웅이는 언제봐도 귀엽다.
뭔가 할 말이 있는듯 준민이가 재웅이 오기 전부터 기웃거리더니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이준민 왜?"
"까먹었어요."
"뭘 까먹어?"
"선생님이 서진이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 보다가 할 말을 까먹었어요."
뭔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녀석은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들어가려다가 소리친다.
"아, 생각났다. 아이비스라는 가게가 있어요. 공 뽑는데 한 개가 백 원이에요. 안타 걸리면 주는 거고요, 빨간색 걸리면 안 주는 거예요. 안 걸리면 백 원만 낭비잖아요. 그래서 저는 오십 원을 넣어본거예요. 근데 안타 걸려서 야구공이 나왔거든요. 천재죠?"
이 때 옆에 있던 무성이가 무겁게 한 마디 한다.
"다른 사람한테 소문 내면 안 될텐데..."
그러고보니 무성이는 저금 통장 내고부터 계속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만 듣고 서 있다. 딱히 할 말은 없는 듯하다.
준민이는 무성이 걱정에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십원 보다 좀 큰 거 십 원짜리 있잖아요. 근데 십 원짜리도 안타 걸려서 농구공이 나왔어요."
만약 준민이 말이 사실이라면 가게 주인은 손해가 클 것 같다.
"그럼 그거 주인아저씨한테 이야기해야 되는 거 아니가?"
"아저씨 아니고 아줌마에요."
이 때 예진이와 지혜가 화장지를 들고나오는 바람에 이야기가 잠시 끊긴다.
"아줌마한테 얘기 안 해도 돼?"
"아줌마한테 이야기했어요.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표정이 영~ 미덥지 못하다.
"정말 했어?"
준민이는 주저한다.
"그게 아니고 십 원짜리 돼요? 하고 물어봤는데 안될거라고 했어요."
준민이 마음속에는 미련이 남아있는 듯하다.
"그럼 앞으로 이야기 안 할거야?"
"이야기해야죠. 근데 어떤 형이 내가 십 원짜리, 오십 원짜리로 했다고 뺐았어요."
"니가 뽑은 공을 가져갔다고? 어떤 형이야?"
"축구 잘 하는 형인데 5학년인 건 알아요."
이야기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개그콘서트 '시청률의 제왕'에 나오는 막장드라마 비슷하다.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성이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나는 준민이가 직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준민이를 힐끗 보니 그렇게 하겠다는 눈치다.
"어떻게 말할래?"
"십 원, 오십 원 되나 안 되나 해봤더니 됐는데 어떤 형이 뺏어갔어요 라고요."
듣고 보니 살짝 걱정이 된다. 아줌마가 준민이한테 물어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아줌마한테 귀띔을 하는 게 어때. 이 기계 십 원짜리, 오십 원짜리도 된다고 소문났던데요 하고 알려주는 걸로 말야."
준민이는 생각에 잠긴다. 하여튼 아줌마한테 말하는 걸로 이야기를 끝낸다. 준민이는 언제나 할 말이 많은 아이다.
준민이가 가자마자 경수가 헐레벌떡 나온다.
"저는 놀이 못하죠?"
"그럼."
"구경도 못해요?"
"구경은 할 수 있다."
오전까지 놀이금지 벌칙을 받는 경수는 겪은 일 쓰기를 마치고 노는 친구들이 부러운 거다.
"점심 시간까지 못해요?"
"그래. 점심 먹고는 할 수 있다."
"네??탕; font-size: 12pt;">어제 경수를 비롯한 일곱 명이 수업 준비가 늦거나 수업중에 이야기하다가 이름이 적혔다. 이렇게 이름이 적히면 우리 반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벌칙을 받는다. 벌칙 내용은 하룻동안 놀이 금지, 급식소 갈 때 맨 마지막에 서기, 우유추첨 때 당첨돼도 선물없음이다. 이 가운데 남자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놀이금지다.
경수는 점심 때부터 놀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헐레벌떡 들어간다. 무성이는 아직도 옆에 서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민재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눈길을 주니 입을 연다.
"합기도에서 줄넘기대회 해요."
"언제?"
"내일요. 그래서 오늘 줄넘기 들고가야해요."
이 말을 하려고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준다.
경호가 숨을 몰아쉬며 겪은 일 쓰기 공책을 들고나온다. 글을 다 썼다는 뜻이다. 내용은 길지 않지만 정성껏 쓴 흔적이 엿보인다.
'제가 선생님하고 기와집을 만들었어요.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기와집이 넘블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람도 있었어요.'
경호는 얼마 전까지도 문자표현이 잘 안 됐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글만 쓰면 가져와서 자문을 받으니 태도가 기특하다.
이번 글에는 '넘블다고'라고 쓴 표현 외에는 달리 모자란 표현이 없다. 경호 말로는 '넓다'는 뜻이란다. 모형 기와집을 만들었는데 넓어보이더라는 표현이다.
사람도 있었다는 말이 뭐냐고 물어보니 직접 기와집을 들고 온다. 그렇구나. 기와집 마당에 꽂아둔 납작한 사람 인형 두 개가 보인다.
경호는 책 읽는 선생님한테 가서 함께 책도 읽고 공부도 한다고 한다. 거기서 도움을 많이 받았는지 자신감이 커진 느낌이다. 경호가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아 나도 기분이 좋다.
이제 아이들이 아침에 써 놓은 겪은 일 공책을 둘러볼 시간이다. 그러나 시계를 보니 곧 수업 시작이다. 공책 보기를 나중으로 미루고 수업 시작을 알린다. 그러자 여태껏 내 옆을 지키던 무성이가 슬금슬금 자리로 들어간다. 할 말도 없으면서 왜 계속 머물러 있었을까?
"무성아, 지금까지 왜 여기 서 있었니?"
무성이가 민채를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아침 시간 내내 무성이 자리를 민채가 차지하고 있다.
"민채가 니 자리에 있어서 못 들어간거야?"
"아뇨. 민채가 제 자리에서 글 쓴다고 해서 양보했어요."
이제 의문이 풀린다. 숙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갈 데가 없어서 여태껏 내 옆에서 머무르고 있었구나. 무성이는 정말 멋진 사나이다.
바쁜 아침 시간이 지나간다. 우리 반의 아침은 늘 이렇게 번잡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번잡한 것에서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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