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5월 27일 - 지구는 무서워

늙은어린왕자 2014. 9. 23. 18:07

[별에서 온 선생님] 지구는 무서워

'친척들과 있었던 일을 그려보자.'
통합 시간에 이런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로 하고 무엇을 그릴 지 이야기를 나눴다. 미리 과제를 내 준 덕분에 아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어떤 일을 그릴 지 정해왔다. 친척들과 계곡 갔던 일, 함께 모여 밥 먹었던 일, 놀이공원에 갔던 일, 바닷가에 갔던 일, …‥. 발표가 줄을 이었다. 미처 정해오지 않은 아이들도 발표를 들으면서 힌트를 얻었는지 대부분 그릴 장면을 떠올린 듯 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잡혀갈 무렵 나도 아이들 앞에서 경험 한 가지를 발표했다.
"얘들아, 내가 만약 그린다면 벌레한테 물린 일을 그리고 싶어. 왜냐면 그저께 친척들하고 산에서 나무 베다가 팔목에 알 수 없는 벌레한테 물렸거든."
아이들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산언덕에 있던 죽은 소나무를 베려고 수풀을 헤치고 다녔는데 말야, 오른쪽 팔목이 간질해서 봤더니 피가 나는 거야. 글쎄 피부에 조그만 구멍도 보이네? 거기서 피가 한 방울 또 한 방울 이렇게 나고 있었어."
팔목에 구멍이 났다는 말에 아이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 여기가 퉁퉁 붓고 색깔도 시커멓지 않니?"
아직 붓기가 남아있는 팔을 들어보이자 아이들은 그제야 믿기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상처를 물로 씻기만 하고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이 되자 팔목이 제법 부었다. 보건실에 가서 파스 바르고 붓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오후가 되자 점점 심해지더니 팔꿈치까지 부어올랐다. 오른팔이 뽀빠이 팔처럼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퇴근 무렵이 되자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더니 머리도 어지럽고 숨결도 가빠졌다. 운전해서 김해까지 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 나서는 길에 야간 경비아저씨한테 팔을 보여줬더니 아저씨가 깜짝 놀라는 거야. 아저씨는 '아, 아니 이럴 수가! 이거 빨리 병원에 가야 돼요. 외계인들은 지구 곤충한테 물리면 큰 일 나요.' 하며 나를 떠밀었어. 빨리 병원에 가라고 말이야."
몇몇 아이들이 질문을 던졌다.
"경비 아저씨가 선생님이 외계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진지하게 답했다.
"선생님별은 밤에 봐야 하잖아. 내가 밤에 옥상에서 별 보는 거 아저씨는 알아. 외계에서 와서 그런다는 것도 다 알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 밤에 학교 지키는 야간 경비아저씨만 알아."
아이들은 믿어야 할 지 안 믿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나는 그 길로 병원에 갔어. 근데 의사선생님이 상처를 보더니 중얼중얼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이상하다. 이건 지구인들이 벌레에 물려서 생긴 증상이 아닌데…‥. 이상하네.' 이러더니 혹시 숨이 가쁘지 않느냐고 묻는 거야. 나는 그렇다고 했지. 또 머리가 어지럽지 않느냐고 물어. 나는 또 그렇다고 했지. 그러니까 큰 소리로 '조금만 늦게 왔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당신 같은 외계인은 몸에 지구 곤충 세균이 들어가면 곧 죽어요. 얼른 세균 잡을 군사 세균을 몸에 집어넣읍시다!' 이러는 거야.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어. 지구인들은 세균이나 병균이 들어오면 그걸 물리치는 군사가 몸 안에 있잖아. 그걸 항체라고 하잖아. 근데 나 같은 외계인은 그런 군사가 없어. 그러니까 곤충 입에서 들어온 세균이 내 몸에 쫙 퍼졌다는 거야. 이 세균을 잡으려면 주사기로 군사 세균을 넣어야 된대."
항체 설명은 의외로 이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독감에 걸렸거나 몸이 아팠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주사를 세 대나 맞으라는 거야. 세균이 많이 퍼져서  군사가 아주 많이 필요하대. 너희들도 주사 무서워하잖아. 나도 엄청 무서워하거든. 그걸 세 대나 맞으라니…‥."
아이들도 따끔한 주사바늘이 생각나는지 몸을 움츠렸다.
"근데 선생님별에는 몸에 나쁜 세균 곤충 없어요?"
"전에 말했잖아. 우리별에 사는 곤충은 전부 아이스크림이나 초코 맛이 난다고. 우린 그걸 먹고 산다고 말야. 곤충들이 사는 숲 속도 이불처럼 포근해."
나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다른 별에서 우리별을 얼마나 탐냈겠니. 마구마구 침략했어. 왕자였지만 난 할 수 없이 별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싸움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거든. 그래서 지금 지구에 있는 거고."
내가 슬픈 표정을 짓자 재잘거리던 아이들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나는 침대로 가서 엉덩이를 내놓았어. 근데 간호사님이 어찌나 엉덩이를 세게 때리던지. 주사 한 방에 다섯 대나 때리는 거야. 이렇게 말야."
내가 간호사 흉내를 내며 엉덩이를 때리자 아이들이 까르르 넘어갔다. 
"근데 말야."
나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난 지구가 무서워. 지구가 살기 좋기만 한 곳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무서운 곳인 줄 몰랐어. 지구 곤충은 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물면서 세균이나 병균까지 몸에 넣잖아?"
아이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산에 가면 모기도 많아요."
"쏘는 벌레도 많아요. 진드기도 있어요."
아이들은 저마다 겪은 해충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래. 난 이번에 진짜로 지구가 무서운 줄 알았어. 어쨌든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나무 베다가 벌레 물린 그림을 그릴거야."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했지만 아이들은 아직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했다. 도은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선생님, 피라냐 알아요? 피 빨아먹는 물고기에요."
나는 알지만 모른 척했다. 그러자 재웅이가 거들었다.
"정글에서 살아요. 피라냐 영화도 나왔어요."
지구에 이렇게 무서운 물고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있으니 동혁이가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선생님, 상어 알아요?"
나는 역시 모른 척 했다.
"커다란 물고긴데요, 사람도 잡아먹어요."
동혁이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죠스’가 스치는 듯했다.
"그렇구나! 지구에는 정말 무서운 동물이 많은 것 같아. 앞으로는 진짜 조심해야겠어."
동혁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로 들어갔다. 외계인에게 정보를 주어서 뿌듯하다는 뜻이겠지?
나는 속으로 지구인들은 정말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팔을 퉁퉁 붓게 한 벌레도 무섭고, 주사 바늘 찌르던 간호사 손길도 매서웠지만 정말 지구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4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