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교육일기

숙제와 벌

늙은어린왕자 2014. 12. 24. 21:17

어제(6월 5일) 있었던 일이다.

1교시에 숙제 검사가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내준 '주장하는 글쓰기' 숙제였다. 검사를 하기 전에 언뜻 보니 여기 저기서 숙제를 한다고 이면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많이 안해온 듯했다.

써온 글을 책상 위로 올리라고 하고 하나 하나 검사를 해나갔다. 그렇지만 곧 그만두었다. 예상대로 글을 써온 아이가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해온 사람 손을 들라고 했더니 자그마치 28명이나 들었다. 46명 가운데 28명이라면 68%나 되는 비율이다.

놀랐다. 교직에 들어온지 9년째지만 반 아이 중 절반 넘게 숙제를 안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곧 허탈감이 마음 속으로 밀려들었다. 무작정 아이들을 일으켜 세워 놓고 고민에 빠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을까. 마음이 갈피를 못잡고 있는 동안 1시간이 흘러갔다.

주장하는 글쓰기(논설문)가 생활글이나 시와는 달리 딱딱하고 다소 논리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분야라 지난 주 화요일부터 전문서적을 참고해서 만든 자료를 나누어주고 개요 짜기 방법과 글을 써나가는 방법을 설명한 터였다. 그래도 어려울까 싶어 토요일에는 두 시간을 따로 내어 개요짜기도 같이 하지 않았는가.

쉬는 시간이 되어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선생님들은 내 이야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벌써 그런 문제에는 초연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어느 선생님은 아이들더러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갈등상황을 가족과 같이 협의해보고 의견을 구해오라는 숙제를 냈더니 단 2명이 해왔다고 속상해했다. 또 다른 선생님은 "아직까지 숙제 검사하고 속상해 하나? 안해오면 안해오는대로 내버려 둬라"며 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물론 선생님들이 늘어놓는 푸념은 어디까지나 푸념에 그치겠지만 그만큼 학교 공부에 소홀하고 선생님의 의도와는 다른 길로 나아가는 아이들이 최근 들어 부쩍 많아졌고, 그런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말일게다.
2교시가 되어도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서 있는 아이들더러 책상 위에 꿇어 앉아 오늘 일에 대해 반성의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그리고 무작정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수히 이런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고작 회초리로 손바닥 한 대 때리거나 내일까지 다시 해오라는 말 한마디로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평소와는 다른 실망감과 허탈감이 마음 속을 짓눌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몸을 뒤척일 무렵 입을 열었다.

"오늘 일에 대해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 있으면 말해보아라."
"...."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명백히 잘못한 일로 벌을 주는 상황인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잘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되겠는지 물었더니 의외로 즉각 반응이 나왔다.

"글 안써온 사람을 오후에 남겨서 쓰고 가라고 하지요."
"반성문을 30장 쓰게 합시다."
"오늘 숙제 안한 사람 청소 시키지요?"

아이들도 어떻게든 이 어려운 상황을 끝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운동장 20바퀴 돌리고 글쓰게 하자"는 의견이 나올땐 서로 매서운 눈초리가 오가기도 했다.

"그래, 다들 좋은 의견이다만 오늘 문제는 그런 벌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같다. 벌을 받는 것은 좋지만 하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 필요없다. 그래서 오늘은 반성의 시간을 더 가진뒤 글 안쓴 아이들은 오후에 남아 쓰고 가도록 하자."

평소에는 1분 1초라도 빨리 안마친다고 성화를 부리던 아이들도 오늘은 모두 잠잠했다. 어느 정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은 다들 한 모양이다. 그렇게 4시간이 흘러가고 갈등은 일단 끝이 났다.
어쩌면 그 4시간 동안 글을 다시 썼다면 다 썼을 수도 있었겠다는 후회를 나중에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게 오히려 벌을 주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짜피 숙제를 낸 목적은 아이들이 주장하는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자칫 숙제를 해야 하는데 안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에 사로잡혀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러나 다른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최근 들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에서 적잖이 실망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고, 그런 아이들의 의식 속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이해해주는 교사가 올바른 교사라지만 잘못에 눈을 감아주는 것도 늘 옳은 처사는 아닐 것이다.

과연 어제의 내 방법으로 아이들의 마음 속에 어떤 흔적이 남았을까 궁금하다.
(20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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