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온 선생님]
잊어버린 기억
점심 먹고 4교시 시작하는 시각, 여기 저기 흩어져서 놀고 있던 꼬물이들을 불러모았다. 꼬물이들은 펼쳐놓은 놀잇감을 정리하고 꼬물꼬물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대개 꼬물이들이 모두 자리에 앉고 책 펴고 공부를 시작하는 데까지는 걸리는 시간은 대략 사~오분, 레고 만들기 놀이에 빠져있거나 종이 장난감 가게를 열 때는 이 보다 더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다. 채 삼 분도 되지 않아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3학년이 가까워지니 이제 꼬물이 껍질을 벗고 '우화'하는 걸까 걸까? 안드로메다 아지트에 매달려 있던 암끝검은표범나비 번데기에서 나비가 태어나듯 말이다.
"이제 너희들도 3학년이 다 되었어. 유치원이나 1학년 때처럼 선생님이 하나하나 이래라, 저래라 할 때가 아니야.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최근에 했던 이런 잔소리가 약발이 먹힌 걸까? 이것도 아니라면 시험 앞두고 진도 맞추느라 험상궂게 변한 내 표정 때문에?
어쨌든 모두 자리에 앉았고 교실 분위기도 차분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먼저 기분을 낸다.
"공부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 하나 하고 갈까?"
꼬물이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큰 소리로 합창한다.
"네~~~엣!"
그러면서 할 이야기까지 꼬집어 낸다.
"선생님이 꿈 속에 들어간다고 했잖아요!"
"그래 맞다. 그 이야기 마무리할거야."
아이들이 반기니 교실이 덩달아 환해지는 느낌이다.
"송장 말대로 아무도 몰래 집에 들어가 임산부가 잠 들도록 기다렸지. 꿈 꾸면 꿈 속으로 들어가려고 말야. 조금 있으니까 임산부가 자리에 눕더니 잠에 들어. 그리곤 꿈을 꾸려는지 몸을 막 뒤척여. 이 때다 싶었어. 가만히 꿈 속을 들여다 보니까 임산부가 산에 오르는 꿈을 꾸고 있네? 온 동네가 컴컴한데 저 산 위쪽은 밝아. 무슨 까닭인지 임산부가 밝은 빛이 보이는 산 위로 막 올라가."
여기서 잠깐 이야기를 끊고 칠판에 꿈 속 상황을 칠판에 간단히 그렸다. 그러자 칭찬이 줄을 잇는다.
"선생님 그림 잘 그려요!"
"맞아요!"
공부 대신 이야기 해준다고 칭찬으로 보답하는 녀석들이 제법 의젓해보인다. 이러니 요즘 우리 꼬물이들이 우화를 앞두고 있는 큰 아이들 같다고 생각하는 거다.
"임산부가 컴컴한 산길을 오르는 걸 보다가 산 너머로 넘어가보니까 세상에! 저 쪽 하늘에서 작은 해 여러 개가 막 달려오고 있는거야. 아니, 날아오고 있는거야. 서로 먼저 오려고 난리야. 나는 얼른 눈치를 챘지. 그리고는 재빨리 해로 변신해서 하늘로 날아올랐어. 휘이익 소리를 내며 해들과 같이 날아가는데 어떤 해는 엄청 빨라. 내가 지면 안되겠지? 안드로메다에서 지구까지도 왔는데 저기를 못 갈게 뭐있겠니? 나는 엄청난 속도로 날았어. 산 위를 보니까 임산부가 막 꼭대기로 올라서 팔을 벌려. 어쨌겠니? 내가 제일 먼저 임산부 품에 안겨버렸지. 그래서 내가 거기서 지구인으로 태어난거고."
조마조마 하며 이야기를 듣던 몇몇 꼬물이들이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임산부는 해를 잡으러 온 거에요?"
"그렇겠지. 마을이 너무 어두우니까 밝은 해를 가져가고 싶었겠지."
"책에서도 비슷한 걸 본 것 같아요."
강감찬 장군은 별이 떨어져 태어났고, 전태일 열사는 달이 어머니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뒤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많으니까 어디선가 볼 수도 있었겠다.
이 때 나연이가 아주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선생님은 어떻게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많이 다 기억해요?"
나연이는 정말 질문하는 타이밍이 기막히다. 딱 내가 하려는 얘기에 관해 물어본다.
"그게 궁금할거야.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나처럼 많은 일이 있었을텐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에 다 잊어버려. 혹시 태어나기 전 일을 기억하는 사람 없니?"
"....."
"없는 게 당연하겠지. 다 잊어버리니까. 근데 나는 이상하게 하나도 까먹지 않은거야. 아마 너희들 중에도 나처럼 외계에서 온 사람이 꽤 있을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너희들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 못해도 식구들은 너희들이 온다는 신호를 받아. 엄마가 받기도 하고 아빠나 할아버지, 할머니도 받아. 어떤 사람은 이모, 고모도 받더라구."
곰곰이 생각하던 민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맞아요. 저는 외할아버지가 바닷가에서 아~주 예쁜 조개를 주워서 엄마에게 주는 꿈을 엄마가 꾸었대요."
"그렇지. 바로 그런거야. 엄마가 신호를 받았네."
"그럼 제가 태어나기 전에 조개였단 말이에요?"
"아니, 니가 조개였단 말이 아니고 니가 조개로 변신해서 할아버지 손에 잡힌거지."
아쉽게도 민채는 조개로 변신하기 전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민채 이야기를 듣더니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갔다.
"저는 엄마가요 예쁜 사과를 잡는 꿈을 꾸었대요."
나연이가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연이는 사과로 변신했구나."
"저는 할아버지가 가마솥에 물을 넣고 끓이다가 두껑을 여니까 커다란 구렁이가 살아서 나왔대요."
도은이는 자기가 구렁이로 변신했다는 게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경수도 빠지지 않았다.
"저는 엄마가 커다란 호랑이를 만났대요."
과연 경수는 평소에도 높은 산에 사는 호랑이처럼 행동이나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다. 근데 경수 쌍둥이 동생 경호는 아기양처럼 보들보들한데 이건 어찌된 일일까?
"경호는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경수-경호는 쌍둥이인데 꿈을 따로 꿨단 말야?"
"....."
경호 어머니는 호랑이를 한 마리 만났을까 두 마리 만났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진이는 용을 만났다는데 누가 어디서 만났는지는 자세히 알지못했다.
이렇게 꼬물이들은 저마다 과거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되살렸다. 그러나 여전히 한 명도 변신하기 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정말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나랑 이야기가 통할텐데 이 점이 참 아쉬웠다.
이때 재웅이가 아주 이~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요 엄마가 하늘에서 아기천사를 만났대요."
천사라고? 나는 귀가 솔깃했다. 천사를 만나는 건 우리별 사람들이 겪는 일인데... 그럼 혹시 재웅이 어머니도 우리별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잔뜩 기대에 부풀었는데 어디선가 찬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천사가 아니고 악동천사 아이가?"
준하 말에 재웅이가 발끈했다.
"니가 악동천사다!"
재웅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꼬물이들이 웃으며 재웅이를 주저앉히는 바람에 겨우 소동이 가라앉았다.
이튿날에도 꿈 이야기는 계속됐다.
"엄마가요 연못에서 예쁜 물고기를 잡았대요."
"가영이는 물고기로 변신했구나!"
"엄마가 예쁜 반지를 받는 꿈을 꾸었대요."
"오~ 정민이는 반지로 변했고."
"저는 엄마가 큰 호랑이를 만났대요."
"우와, 지영이는 호랑이로 변신했구나!"
"저는 엄마가 구렁이를 잡는 꿈을 꾸었대요."
"아하, 본희는 구렁이로 변했고."
이야기를 나누며 꼬물이들은 생각에 빠졌다. 자신도 선생님처럼 외계에서 왔을까? 식구들 꿈속에 나오기 전에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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