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평가 사태를 바라보며
교원평가를 둘러싼 논란이 광풍처럼 일더니 전교조의 연가투쟁 연기 선언을 고비로 별 일 없었다는 듯 잠잠하다. 마치 강한 태풍에 뒤집어지던 바다가 바람이 지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진 모습과 같다. 달리 보면 이렇게 잔잔한 바다는 또 뒤집어질 미래를 속으로 품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우선 반성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생겼다. 바로 조합에 대한 미안함이다. 전교조 조합원으로 13년 째 교사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전교조의 투쟁노선에 큰 부담감을 갖고 있었다. 전교조가 언제나 투쟁만 하는 조직도 아니고 또 내가 무조건 투쟁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데 물리적으로 사람을 동원하는 방식과 상대방과의 충돌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러한 물리적인 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무엇을 얻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학생들의 인권이야 어쨌든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사람들과 일전불사의 자세로 싸우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나 후회를 하고 있을까 싶다. 싸울 당시에는 주변의 부정적 시각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고, 계속되는 싸움에 많은 조합원들이 조직을 떠나기도 해서 조합에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이유로 불만이 많았지만, 싸운 결과 당시에는 생소하기도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정보인권’이라는 말이 이제는 누구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교원평가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고 있고 교직사회 내에서도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치는데도 전교조는 적당한 타협 대신 평가에 앞서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점에 관해 의연하게 이야기를 했다. 거대 보수 언론들의 그릇된 여론 몰이로 전교조를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비난을 하는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이제 교원평가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전교조가 단지 교원평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구적인 이미지로 낙인 찍혀 비난받는 모습이 안타까운 나머지 ‘반대’라는 글귀 대신 ‘찬성’이라는 글귀를 먼저 내세우는 쪽이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었다. 물론 ‘찬성’은 교육 여건이나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부 찬성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이런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조건부 찬성을 넘어 과연 교원 평가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인식에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다. 전교조의 원칙적인 자세가 없었다면 묻혀버렸을 생각이다. 어쩌면 나도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되어 메카시즘 광풍에 휩쓸려 비난자의 대열에 선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되는 대목이다.
[언론보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어요. 님은 전교조가 주장하는 내용을 한 번이라도 보고 그런 말을 하나요?'
한창 논란이 가열되어 있을 즈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교조를 거칠게 비난하는 글에 전교조의 입장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달아놓은 댓글이다. 평범한 표현 같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적어도 아무런 근거나 논리도 없이 비판이나 비난을 해대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해주고 싶은 말이다. 또 빈약한 근거로 마치 부분이 전체인양 호들갑을 떨며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보수 언론들에게는 반드시 해주고 싶은 말이다.
교원평가 논란을 계기로 언론에서는 다양한 교육관련기사를 내보냈다. 연재기사로 눈에 띄는 것은 SBS와 중앙일보의 기사다. SBS는 촌지, 체벌, 찬조금품 등 학교 현장의 일반적인 문제들을 들춰내며 주로 교사들에게 초점을 맞춰 교원평가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력했는데 다소 선정적인 태도로 보도를 해서 일선 교사들이 마치 거대한 부패집단이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때문에 평소 말이 없던 선생님들조차 보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생활지도면에서 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내는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란이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한 것은 학교에서 반성할 부분이지만 학원에서 보내오는 생활기록란과 평면적으로 비교한 부분은 학교의 실정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 ‘철밥통 교사직’이라는 꼭지에서 10년차 어느 교사의 연봉이 같은 경력의 삼성전자의 과장보다 많다고 보도한 것은 사실의 왜곡이 지나쳤다는 지적이 많았다.
하지만 SBS의 기사들은 학부모들이 체감하는 학교의 일반적인 문제들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교사나 학교, 당국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고 본다.
중앙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보수언론은 현재 일어나는 모든 교육문제의 원인이 마치 전교조에 있는 양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춘 뒤 ‘전교조 죽이기’식 기사를 쏟아냈다. 마침 전교조 부산지부에서 올린 ‘APEC 바로 보기 공동수업자료’의 일부 내용을 문제삼아 무차별 이념공세를 퍼부었다.
중앙일보는 ‘지금 전교조는...’이라는 연재기사에서 전교조가 처음에는 촌지추방 등 참교육 실천을 위해 애썼는데 지금은 반미교육이나 하고있다는 식의 비판기사를 내보냈다. 또 교사들의 효율적인 연수활동을 위해서 방학중 근무제도를 교육청과의 교섭을 통해 합의해서 없앴는데도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못 나오겠다고 거부’해서 없어졌다고 보도하는가 하면, 교원평가제도 협상도 전교조가 태도를 바꿔 결렬됐다며 전교조가 거부하면 교육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고 몰아세웠다. 물론 전교조의 긍정적인 영향도 소개를 했지만 ‘양념’ 수준이고 전체적으로 기사의 내용이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설은 중앙일보(2005. 11. 08)의 경우 전교조가 APEC 계기수업으로 학생들을 선동한다고 하면서 (노무현)정권의 코드에 맞는 단체라고 방관해 온 데서 비롯됐다는 다소 엉뚱한 결론을 내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생뚱맞았고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게 겉으로 느껴졌다.
그에 비해 조선일보의 사설(2005. 11. 07)은 한 편의 공상 소설을 보는 듯 했는데 상상력이 너무 기발해서 잠깐 소개해볼까 한다.
‘전교조 교사가 길러낸 초등생이 중학교에서, 이어 다시 고등학교에서 전교조 교사의 지도를 받는 전교조의 교육 일관공정이 이 나라 교육을 장악했다. 그 결과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12년 동안 전교조 교육이념의 세뇌를 받은 60만명이 매년 대학과 사회로 쏟아지게 된 것이다. 전교조가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자체를 개조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손석춘 한겨레 논설위원의 지적처럼 ‘그래서 얼마나 붉어졌는가’ 하고 묻고 싶은 구절이다. 사설의 끝 부분에 중국과 일본의 교육상황을 소개하며 써놓은 결론은 섬뜻하고 비장하다.
‘전교조에 이끌려 다니는 한국만 전 세계적인 교육 혁신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고 … 실패로 낙인찍힌 자신들의 수구적 좌파 이념으로 블록 찍듯 우리의 아이들을 찍어내고 있다. 대한 민국과 대한민국의 교육을 전교조의 손에서 구출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 손에 내맡겨 국민과 국가가 다 같이 세계의 낙오자가 될 것인가를 국민이 결단할 때다.’
조선일보의 시각에 의하면 전교조는 대단한 단체임에 틀림없으나 학교시스템 개혁의 첫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근평제도 하나 제대로 바꿔내지 못한 전교조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낙오시킬 만큼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궁금할 뿐이다.
일련의 교원평가, 전교조 관련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온건한 길로 조합이 가길 바라는 내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교원평가 반대로 전교조가 여론에서 밀리자 핵심 주제와는 별 관련 없는 소재인 APEC 공동 수업 문제를 부풀려 이념과 색깔 공세로 이참에 전교조 죽이기 작전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부 문제를 가지고 교직사회 전체가 그럴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기사나 자기들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직 전체를 비난하고 왜곡하는 비이성적인 언론이 있는 한 교육의 발전은 물론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은 아직 멀기만 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 언론에게 묻고 싶다. 알아야 보인다는데 과연 학교와 교육에 대해 알고 있기는 한가.
[교원평가]
교원평가와 관련해서 인터넷에서 읽었던 비유를 하나 예로 들어보자.
서비스가 엉망인 시내버스 때문에 오랫동안 불편을 겪어온 시민들이 있다고 치자. 이런 경우 시민들과 버스운전자가 아무리 티격태격 싸워봐도 문제의 본질에는 이르지 못한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버스회사 최고경영자의 회사 경영 철학과 방침, 각종 정비업무와 배차 시간, 운전사들에 대한 복지 수준 등 총체적인 운행지원 시스템을 두루 점검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의욕은 자칫 가운데 낀 운전사들에게 새로운 부담으로만 작용할 가능성이 짙지 않겠는가? (박 아무개 교사)
박 교사께서는 시내버스의 문제점은 최고경영자의 경영철학과 방침 등이 복합적으로 시스템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교육부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교육정책과 방침 등이 복합적으로 문제가 있는 듯이 말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학부모, 학생의 의견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발언이다. 우리는 단지 ‘난폭 운전’을 하는 ‘일부 기사’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이 제도를 찬성하는 것이다. (김 아무개 학생)
이 예는 전교조의 입장과 학생, 학부모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양쪽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시각을 포함하고 있다.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런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까 당장 난폭 운전의 당사자를 본보기로 몇 명 자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서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있을까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경영혁신의 비유 중 ‘아이스버그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빙산의 일각’에 해당되는 말로 수면 위로 나와 있는 얼음 덩어리만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만 수면 아래에는 엄청나게 큰 얼음 덩어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보면 보다 큰 문제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비유이다.
실질적으로 빙산의 일각에 해당되는 피상적인 문제에 자신의 리더십을 소진하는 사람도 있다. 불량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고객 불만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손실 요인을 없애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가 탄생하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 한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 교사의 지적이 맞다.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실적에만 집착하면 엉뚱한 묘책만 나오기 마련이다. ‘묘수를 3번 이상 두면 바둑은 진다’라는 말도 근본적인 문제해결로 가라는 지적이 담긴 바둑격언이다.
하지만 묘수라도 두어서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마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본다. 단지 ‘난폭 운전’을 하는 ‘일부 기사’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평가제도를 찬성한다고 보는 학생과 그에 동의하는 학부모들은 아마도 적잖은 시달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 있는지도 모른다.
교육 수요자들인 학생과 학부모들이 교원평가를 도입하려는 목적은 대부분 ‘난폭 운전’ 기사들의 태도를 바꾸거나 심지어 아예 쫓아내는 데 있는 듯하다. 어느 누리꾼이 예를 든 것을 보면 ‘날마다 자습시키는 선생’, ‘이유 없이 폭력 쓰는 선생’, ‘학습준비 잘 안 해와서 질문해도 대답 못하는 선생’, ‘돈 밝히는 선생’ 등이 교육계의 ‘난폭 운전’ 기사들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더러 있다. 또 나는 안 그렇다고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느 새 나 자신도 그런 의심을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집 아이를 가르치면서 내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생각하면 곧 학교에 들어갈 우리 아이가 혹시나 이런 소문이 난 교사의 반에 들어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들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답답해진다. 대응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에 교원평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각이 멈췄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도올 김용옥 선생이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은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형의 지지가 그러한 평가를 통하여 좀 저질스런 교사를 솎아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기대는 근원적으로 부적절한 것이다. 아무리 평가를 많이 한다 해도 그것은 저질적 교사의 징계에까지 이르는 법적 효력을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력을 수반하지 않는 평가는 결국 교육의 장에 불필요한 잡음과 불신과 교육적 열의나 신바람의 냉각만 초래할 것이다.”
또 이미 교수평가제를 실시하고 있는 한 사범대학 학생은 ‘진지하게 답변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코드와 맞지 않거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인간적으로 싫은 타입, 너무 빡빡하게 군다든지 하는 등의 교육자로서의 자질과는 크게 무관한 이유로 교수평가를 엉망으로 실시하고 있다’며 교원평가제 실시를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밝히기도 했다.
평가 방법도 문제가 된다. 수업으로 평가한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잣대로 수업을 분석해야 하는지 객관적인 기준이 명확히 제시된 적이 없고, 학교생활 만족도라는 것도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교사끼리 하는 다면평가 역시 주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행위는 수량화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학부모의 막연한 불안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결론을 미리 말하면 교원평가는 결코 마녀사냥 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시내버스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승객들의 요구로 회사에서 ‘난폭 운전’을 하는 기사 몇 명을 해고한다면 우선 다른 기사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잠시나마 서비스가 나아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난폭 운전’ 기사는 또 생길 것이고 그 때도 승객들은 과거와 같은 요구를 하게 된다. ‘아이스버그’식 대응은 문제를 순환시킬 뿐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바램이 일부 무능 교사의 퇴출이 아니라 교사의 자질향상에 있다면 대안은 있다. 바로 학교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다.
현재 학교 사회에는 교육의 발전을 위해 연구하고 나누는 풍토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는 우선 교사 개개인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학습지도나 생활지도에 좀 소홀해도 지금까지 별 문제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학교 사회에 넓게 퍼져 있다.
그러나 ‘교육’ 보다는 ‘행정’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학교 시스템이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기관이므로 일반 행정업무를 추진하는 공공기관과는 달라야 한다. 수업과 공문처리가 겹쳤을 때 학교는 교육기관이므로 당연히 수업이 우선 순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문처리를 위해 수업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거나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수업을 위해 공문처리를 지연시킨 교사는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발전하여 교감, 교장 승진제도로 이어지는데 승진하여 교감이나 교장이 된다는 것은 ‘교육자’가 아닌 ‘행정가’로 입문하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교감이나 교장 등의 직위가 교육의 지원자(수평 개념)라기 보다는 교사들의 상관(수직 개념)이 되어 인사, 재정, 학교운용 등의 결정 권한을 독차지한다는 데 있다.
교원 승진제도의 가장 큰 맹점은 잘 가르치는 것과는 별개로 승진에 필요한 점수만 잘 챙겨도 승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종 연구점수, 부장교사 경력, 농어촌 점수, 벽지 점수, 근평(근무성적평정) 점수 등이 그것이다. 물론 아이들을 잘 가르치면서도 틈틈이 연구하여 승진하는 분들도 있지만, 수업에 신경을 안 써도 승진이 가능하다면 또 그런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면 어느 누가 수업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따라서 가르치는 일이 학교문화의 중심에 자리잡으려면 교사의 의식개혁과 더불어 승진제도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교육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초등교사들은 고학년의 경우 주당 30시간에 육박하는 수업을 감당하고 있다. 그것도 한두 과목이 아니라 재량활동을 포함하여 10개가 넘는 과목을 교사 한 사람이 감당하다 보니 수업 준비에 자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1교시에 한 수업을 2교시나 3교시에 다른 반에서 똑같이 가르칠 수 있는 중등과는 달리 초등의 경우는 매 시간이 새로운 차시이기에 한 시간 밖에 쓰지 못하는 자료를 제작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수업 시간을 줄이는 것과 교과전담 교사를 확보하는 것이 수업의 질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교사 연수 시스템에 변화를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교사의 자질 향상에는 사실 연수만큼 좋은 것이 없다. 자율적으로 연수를 하게 하는 현행 방법과 병행하여 특정 기간이 지나면 꼭 받아야 할 연수를 지정하여 국가에서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교사 연수를 실시하면 수업의 질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개혁과 더불어 교사와 행정당국, 교육수요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인 교원평가 방안을 마련한다면 더불어 교육을 발전시키는 길이 아닐까 한다.
문제 교사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학부모의 불안감은 계속된다. 따라서 합리적인 교원평가 방안은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 행정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개혁을 바라는 교사들의 요구는 계속된다. 따라서 합리적인 시스템 개혁 방안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한다는 뜻이고, ‘비판’은 옳고 그름을 가려 판단하거나 지적하는 것을 말한다. 남에게 비판을 하려면 ‘공’과 ‘과’를 따지기 위한 이해과정이 필요하지만 비난은 그럴 필요가 없다. 비판은 상생의 길로 가게 하지만 비난은 싸움의 길로 가게 한다.
교원평가 문제를 두고 교사집단과 전교조를 두고 일었던 여론을 보며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비판 보다 비난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단면 때문이다. 정도를 가야할 언론들이 그것을 조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희망은 아직 아득히 먼 곳에 있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곧 교원평가 시범실시는 강행될 것이다. 교육계의 관행상 시범실시는 전면실시를 의미하므로 앞으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질 않을 것이다. 과연 어떤 논의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교육의 발전을 이끌 것인가 모두가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월간 우리교육> 2006년 6월호에 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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