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8월 31일 - 시합이 된 역할나누기

늙은어린왕자 2010. 8. 31. 21:31

8월 31일 구름 속으로 텁텁한 햇살이 비친다.

시합이 된 역할 나누기


  새 학기를 맞아 역할 나누기를 다시 했다. 이번에는 지난 1학기와 달리 역할을 좀 더 촘촘하게 짰다. 예전에는 1분단 청소를 두 명이 쓸고 닦고 정리했는데 이번에는 세 명으로 늘려 쓸고 닦는 사람, 책상 정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었다. 우유담당도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려 두 명은 가져오기만 하고 한 명은 빈 상자를 갖다 놓는 일만 하도록 했다. 같은 역할을 맡은 아이들끼리 서로 일을 많이 했니 적게 했니 하며 가끔 다툼이 있어서다.

  칠판, 우산꽂이, 게시판 같이 인기 있는 곳은 서로 맡겠다고 해서 가위바위보로 정하고 나머지는 신청하는 대로 맡을 사람을 정했다. 거의 마무리 될 즈음 ‘복도 닦기’ 맡을 사람을 정할 때 작은 소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가연이만 신청했다. 그런데 ‘쓰레기봉지’에 이름을 올렸던 찬기가 마음을 바꿔 함께 신청해버렸다. 이럴 땐 가위바위보 밖에 달리 정하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자 여학생들이 떼를 지어 먼저 신청한 가연이를 올려야 한다고 목멘 소리를 했다.

  하지만 찬기가 양보할 마음도 없는데 가연이만 올릴 수가 없었다. 조금 전에도 ‘게시판’ 담당에 먼저 신청한 미경이를 올렸다가 민서가 따지는 바람에 둘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했기 때문이다.

  “인기투표를 해서 많은 쪽으로 정해요.”

  “야, 그럼 가연이가 당연히 이기지. 여자가 많으니까.”

  “인기투표는 말도 안돼. 가위바위보로 정하면 되지.”

  이런 저런 말이 오가는 걸 보다가 잠깐 수첩에 뭘 적고 있는데 교실이 술렁거렸다.

  “선생님, 가연이가 이겼어요.”

  심판(나)이 안 보는 사이에 아이들끼리 얼렁뚱땅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가연이가 이겼다는 것이다.

  “찬기는 찌, 가연이는 묵 내는 거 봤어요.”

  가연이를 편드는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찬기를 보니 전혀 인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내가 얼핏 보기로도 은서가 일어서서 가위바위보를 하고 가연이는 그냥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찬기야. 인정하나?”

  “예? 예.”

  여학생들의 분위기에 눌린 듯 찬기는 목소리에 힘을 싣지 못했다.

  “솔직히 못 봤제?”

  “예.”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찬기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너는 찌 내고 나는 묵 냈거든.”

   가연이가 억울해했다. 그러자 성진이가 말을 받았다.

  “손은서가 가려서 안 보였다.”

  이러다간 자칫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보는 앞에서 다시 가위바위보를 하기로 했다.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

  아이들이 힘껏 소리쳐주었다. 그 결과 찬기가 이기자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무서운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온 교실이 난리였다. 그러더니

  “한 번 더!”

를 외쳐댔다.

  “이제 일대 영이잖아요.”

  경민이 말을 듣고 보니 마치 내가 가위바위보를 세 번 한다고 약속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까 찬기도 이러다가 혼이 빠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세 번으로 하자. 찬기가 한 번 이겼으니까 한 번 더 이기면 끝난다.”

  다시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연이가 이겨서 일대 일이 되었다. 손에 땀을 쥐는 승부였다.

  모두들 숨을 멎고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 결과 가연이가 또 이겼다. 그러자 교실에 또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여학생들이 기뻐서 난리였다.

  숨을 고르고 다시 찬기에게 물었다.

  “찬기야, 인정하나?”

  찬기가 평소처럼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예.”

  한 번만 했으면 벌써 끝난 시합인데 세 번 하자고 해서 지게 만들었으니 내가 잘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찬기가 깨끗이 인정해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찬기는 요즘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꼴통28호’ 처럼 내가 묻는 말에 “예”라고만 답했다. 알고 보면 찬기는 그 로봇과는 정 반대인데 말이다.

  컴퓨터 자판에 손을 얹고 아까 써놓은 ‘박’자 옆에 실수(?)로 ‘ㅊ’ 을 썼더니 여학생들이 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선생님, ‘ㅊ’이 아니라 ‘ㄱ’을 써야지요!”

  박찬기의 ‘ㅊ’이 아니라 박가연의 ‘ㄱ’을 쓰라는 말이다. 그래서 ‘박가연’으로 써넣었다.

  이제 다 됐나 하고 한숨 돌리는데 또 한 소리가 귀에 꽂혔다.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여자한테 맞고 다녔죠?”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내가 왜 여자한테 맞고 다녀?”

  “여자를 싫어하잖아요.”

  “찬기만 편들고 찬기만 썼으니까요.”

  말문이 퍽 막혔다. 내가 보기엔 여학생들이 가연이 편만 드는 것 같던데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적반하장(賊反荷杖) :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나무람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