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0 교실일기

8월 30일 - 방학 숙제 검사

늙은어린왕자 2010. 8. 31. 11:52

8월 30일 월요일 구름이 조금 있고 무덥다.

방학 숙제 검사


  2학기 개학날이다. 교실에 들어서니 벌써 아이들이 대부분 다 와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노랗게 물들인 용은이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봐서 크게 달라진 아이가 없었다. 모두들 건강하게 방학을 잘 보낸 듯 싱글싱글한 모습들이었다.

  내 책상 위를 보니 일기장과 독서 공책이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방학숙제 했다고 학교에 오자마자 자랑스레 내 놓았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가연이가 공책 꾸러미를 들고 왔다. 세어 보니 모두 열  권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썼나 싶어 살펴보니 두 권은 이번 방학 때 쓴 일기장이고 나머지는 모두 예전 일기장이었다.

  “예전 일기장은 뭐하러 이렇게 다 들고 오노?”

  “그냥요. 헤헤.”

  일기를 열심히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가연이 마음이 엿보였다. 슬쩍 훑어보니 방학 내내 꼼꼼하게 잘 썼다. 칭찬해주었더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정훈이가 털레털레 들어왔다. 나한테 곧장 오더니 묻지도 않은 일기장 이야기를 꺼냈다.

  “저요, 새 일기장을 팔월 십 며칠부터 썼는데요. 일기장을 안 가져왔어요.”

  새삼 여름 방학 전에 정훈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생님, 이번 방학 때는 숙제 하나도 안 할 거예요. 일기만 쓸 거예요.”

  아무 것도 안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일기를 쓴다고 해서 어찌나 고맙던지 다른 숙제 안 해도 좋으니까 일기는 꼭 쓰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났다. 정훈이는 오늘 학교에 오며 나한테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럼 새 일기장 쓰기 전에 썼던 건 없니?”

  “그건 없어요.”

  “왜?”

  “저는 공책 다 쓰면 버리는 습관이 있어서요.”

  “저런. 그럼 새 일기장은 왜 안 가져왔노?”

  “아침에 제 책상 위에 있었는데요. 깜빡 하고 안 가져왔어요.”

  “그럼 오늘은 아무 것도 가져온 게 없네?”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정훈이를 보며 퍼뜩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을 잊지 않고 말해주는 정훈이가 고마웠다.

  아이들이 다 왔을 즈음 책상을 둘러보니 방학 숙제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얹혀있었다. 재활용품으로 만든 집에서부터 색종이 접기, 그림, 속담이나 수수께끼 조사, 독서 기록장, 시험문제지까지 종류도 가지가지였다.

  “선생님, 빨리 숙제 검사해요!”

  방송 조회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보챘다. 이렇게 시작한 숙제검사가 네 시간을 금방 잡아먹었다.

  첫 시간에는 방학 전에 자기와 한 약속을 지킨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깻잎 농장에서 할아버지 ․ 할머니를 일주일 동안 도왔다는 찬기, 책 백 권을 읽었다는 은서, 박물관과 책에서 가야의 역사에 관해 알아보고 역사책을 만들어온 수인이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또 어려운 수학 올림피아드 문제집을 부지런히 풀어온 태현이, 1학기 수학 문제집 한 권을 모두 풀어온 수지도 노력이 대단했다. 

  둘째 시간에는 방학 중에 생각한 일을 끝까지 했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별자리를 관찰하고 나서 태양계 행성이 궁금해서 자료를 모아온 수인이,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한 은서, 폐품을 모아 멋진 집을 만들어온 미경이, 위인전을 서른 권 읽었다는 민서, 방과 후 미술 수업에서 만든 작품을 보여준 수지 이야기를 들으니 모두 시간을 알뜰히 쓰며 방학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넷째 시간에는 일기쓰기나 독서 기록장처럼 학교에서 <필수과제>로 내주었던 숙제를 어떻게 했는지 한 명 한 명 불러 꼼꼼히 알아보았다. 여기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렇게 모두 훑어보니 이것저것 부지런히 한 아이들도 있고 몇몇은 아무 것도 보여줄 게 없다며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학 동안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학날이면 언제나 이렇게 숙제 이야기로 시작해서 숙제 이야기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