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화요일 엷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음
불법 다운로드? - 선행학습
말하기듣기 시간에 ‘마녀의 빵’이라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화면 없이 소리로 듣는 8분짜리 이야기다. 집중하는 시간이 짧은 아이들에게 8분은 긴 시간이다. 그래서 집중해서 듣도록 하려고 사이사이에 이야기를 멈추고 질문을 하였다.
‘…(줄임) 언제인가 마사는 그 사람의 손가락에 빨간색과 갈색의 물감이 묻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선 이 부분에서 이야기를 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을 던졌다.
“손가락에 빨간색과 갈색 물감이 묻어있었다면 그 사람의 직업이 뭘까요?”
“화가요.”
“페인트 칠 하는 사람요.”
“아니다. 그 사람 설계사다.”
“맞다. 학원에서 이야기 들었다.”
“…….”
반응이 다양하게 나오는가 싶었는데 미리 공부한 아이들이 단정 지어 말하는 바람에 더 말하고 싶은 아이들 입이 그만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사람이 설계사인지 아닌 지 어떻게 알아?”
“학원에서 배웠어요.”
“공부방에서 벌써 공부했는데요.”
이래서는 끊어서 읽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조사해보니 미리 공부한 아이가 열네 명이나 됐다. 절반이 조금 넘는 숫자다.
“학원이나 공부방에서 미리 공부해서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건 마치 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불법 다운로드 해서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불법 다운로드는 나쁜 행동이지.”
“선생님이 미리 공부하면 좋다면서요?”
“미리 예습 하는 건 좋은데 이야기를 다 알고 오면 공부가 재미없을 것 같은데…….”
“왜 우리한테 그러세요. 우리는 공부한 죄밖에 없어요.”
조용히 공부해야 할 시간에 때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들어보니 아이들 말도 맞는 면이 있었다. 미리 공부한 게 아이들이 선택해서 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알고 있다고 다 말해버리면 이야기를 모르는 아이들은 생각을 못하지. 그러니까 미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일러두고 이야기를 이어서 들었다.
‘(줄임) 마사는 재빨리 빵 두 개를 깊숙이 자르고 그 속에 버터를 넣은 다음 표가 나지 않게 얼른 붙였습니다. (줄임) 그 사람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마사를 향해 흔들었습니다. “이런 마녀 같은 여자야.” 하고 마사가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마사가 손님 몰래 버터를 넣어서 빵을 팔았는데 사 갔던 사람이 갑자기 화를 내며 빵집에 들이닥친 장면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끊고 또 질문을 했다.
“그 사람이 왜 화가 잔뜩 나서 들어왔을까요?”
“빵이 썩었어요.”
“그 사람은 버터를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미리 공부한 몇몇 아이들이 입을 달싹이더니 결국 뱉어냈다.
“버터 때문에 설계도가 다 버렸어요.”
“맞아요. 얼룩이 져서 못 쓰게 됐어요.”
아까 했던 부탁은 벌써 잊은 것 같았다. 실망스러웠다.
이런 이야기는 이어질 내용에 관해 호기심을 가지고 상상하며 들어야 제 맛이다. 그래야 뒷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며 듣는다. 그런데 미리 공부한 아이들이 한결같이 정답을 말해버려서 신선도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며칠 전에 미리 따 둔 김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다음 시간 공부에 관해 미리 알아보는 예습은 좋지만 정답까지 모두 구하는 선행학습은 수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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