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월요일 엷은 구름 조금
이점칠 아저씨
이번 주 금요일이 기말고사 시험이다. 지난주에 나눠주었던 예상문제지를 두 시간 동안 매기고 한 시간은 전담시간이어서 진도 나가는 수업은 두 시간 밖에 하지 못했다. 하루가 시시콜콜하게 지나갔다.
수학 시험지를 매기면서 우리는 ‘이점칠’이라는 알듯 모를 듯한 사람 때문에 웃었다.
“삼 번에 사, 사 번에 오, 오 번에 일…….”
내가 정답을 부르는 동안 아이들은 열심히 풀어온 시험지를 매겼다.
“선생님 좀 천천히 불러주세요.”
“아 또 틀렸네.”
“야야 사 번에 뭐라카더노?”
교실은 매기는 필기구 소리와 속닥이는 아이들 소리만 나지막이 들릴 뿐이었다. 평소와 달리 딱딱하고 메마른 공기가 교실에 가득했다.
이런 팍팍한 교실에 변화가 생긴 건 ‘다음 소수를 읽어보시오.’라는 문제의 답을 말할 때다. 예를 들어 ‘0.2’는 ‘영점 이’라고 읽는 식이다. 보통 수업을 할 때는 이걸 ‘영쩜 이’라고 읽지만 행여나 시험에서도 그렇게 쓸까 걱정이 돼서 이런 문제에는 ‘영점 이’라고 표준 발음으로 부드럽게 읽어준다.
“영점 오, 영점 칠…….”
이렇게 계속 읽어주자 아이들이 도저히 못 듣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읽으니까 선생님 바보 같아요.”
“이상해?”
“네.”
“알았다. 이제 안 그럴게.”
대답은 시원하게 했는데 다음 답이 또 소수였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아서 표준 발음으로 읽어주기로 했다.
“이점 구.”
아이들은 또 난리가 났다.
“야, 근데 이거 꼭 사람 이름 같지 않아? 너네들 아버지 이름 중에 이점구씨 없나?”
“없어요!”
“아니, 내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점숙이었는데 그 선생님 형인가?”
“알았으니까 빨리 넘어가요.”
할 수 없이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객관식 문제는 잘 넘어갔는데 마지막에 ‘이점 구’와 비슷한 답이 하나 더 나왔다. 원래 선생님은 올바른 걸 가르쳐야 하니까 이것도 똑바로 읽어주었다.
“이점칠.”
아이들은 또 난리가 났다. 몇몇 아이들이 알레르기 반응까지 보였다.
“아 그냥 ‘이쩜 칠’이라고 하세요.”
“꼭 그렇게 읽어야 되겠어요?”
“아니, 그럼 시험지에 ‘이쩜칠’이라고 쓰면 어떡할라구?”
“그럴 리 없어요!”
세상에 올바로 가르치는 데 이렇게 비난을 듣는 선생님이 어디 있을까?
“야, 근데 이점칠이 진짜 사람 이름 같지 않나?”
그런데 은서가 ‘이점칠’이라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 그럼 인터넷으로 찾아볼까?”
시험지 풀이를 마무리하고 인터넷에서 재미로 ‘이점칠’이라고 검색해보았다. 인터넷에는 많이는 없지만 ‘이점칠’ 이란 사람이 줄줄 떴다.
‘이점칠 단과학원 원장’
‘이점칠 집사’
‘이점칠 성도’
아이들은 답안지에 나오는 소수가 사람 이름으로 나오는 게 신기한 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도 설마 하고 해 본 건데 진짜로 나와서 무척 재미있었다.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이점칠’ 아저씨 때문에 오늘 우리 반 수학 시간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점칠 아저씨 때문에 생각난 이점숙 선생님은 이제 60이 다 되었을 텐데 잘 살고 계시나 궁금하네. 경상도 사람이 서울로 대학 간다고 서울 말 쓰면 절대 안 만나준다던 선생님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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