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목요일 꽃샘추위로 살짝 영하로 내려갔다. 맑음.
가정환경 기초조사서
방과 후에 아침에 걷어놓은 기초조사서를 잠깐 훑어보았다. 먼저 가족사항으로 눈길이 갔다. 엄마, 아빠가 계시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형제자매가 얼마나 있는지만 알아도 아이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라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아버지만 살펴보니 대부분 40대 전반인데 30대와 50대가 각각 세 명씩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평균 결혼 연령(2008년, 남자 31.2세)에 비춰보면 30대 아버지에게 4학년 자녀는 조금 이른 듯하고 50대에게는 다소 늦은 감이 들었다. 50대 아버지를 둔 아이만 따로 살펴보니 두 명은 늦둥이 같은 막내이고 한 명은 늦게 본 외동아이였다.
지난해에는 결손가정 아이가 일곱 명이나 되어서 실수로라도 아이들 마음을 다치게 하지나 않을까 조심하며 지냈는데 올 해는 숫자가 절반에 그쳤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담임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이다. 이 부분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데 해마다 읽고 나서도 꼼꼼히 되새기지 않아서 부모님이 특별히 부탁했던 말도 잊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오늘은 제대로 읽어보고 머릿속에 아로새기기로 했다.
살펴보니 세 명 가운데 두 명 꼴로 글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가장 많은 내용은 새 담임에게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 아들이 한 없이 아이 같다가도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어 엄마로서 자랑스러워하지만 잘못한 일이 있으면 따끔하게 야단쳐 주셔서 아이가 바르게 자라도록 해주세요. 집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서슴없이 말씀해 주시면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한 해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새 학기입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다소 부족한 게 있더라도 잘 부탁드립니다. 조만간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항상 가정에 행복이 깃들길 바랍니다.
고집이 세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 단점이지만 마음은 여리고 순수합니다. 일 년 동안 힘들겠지만 부족한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대개 평범하게 인사 겸 부탁하는 말이 많은데 특별한 사정을 밝혀주는 부모님도 있었다. 이런 글은 조금 더 신경 써서 읽게 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아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가 장사한다는 이유로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어리광도 많이 부리고 엄마의 정도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고집도 세고 승부욕도 강한 반면 마음도 여리고 잘 울기도 합니다. 남들한테 지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라 친구들과 가끔씩 마찰도 생기곤 합니다. 하지만 자기 맡은 바 책임감도 강하고 의리도 있는 부지런한 아이입니다. 선생님께서 일 년 동안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잘 보듬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너무 어릴 적에 아빠와 헤어져 아빠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아빠는 돌아가신 걸로 얘기해뒀습니다. 약간의 틱 현상(눈 깜빡임)이 있는데 혹 보이면 하지 말라고 주의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활달하고 밝은 성격이라 붙임성도 좋고 긍정적입니다. 잘못에 대한 인정보다는 변명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시고 혼내야 될 때 따끔하게 혼내주시고 칭찬을 더 많이 해주시구요. 일 년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숨기고 싶은 내용을 솔직히 이렇게 밝혀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아이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져서 대할 때 참고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우리 반이었던 한 어머니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정성스레 글을 남겨놓았다. 이런 정성에 다시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 싶다.
지난 한 해 동안의 수고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또 한 해 우리 아이를 맡게 되어서 기쁩니다. 부족하지만 스스로도 참을성을 키우기 위해 많이 노력하는 중입니다. 첫 단추 끼움의 중요성을 여러 번 언급했는데 아직은 어려서 자기관리가 서툴지는 않을까 많이 걱정됩니다. 친구들 관계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해 주시고 제가 집에서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든지 도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내용 없이 건강에 관한 이야기만 써놓은 부모님도 있었다. 이런 내용은 정말 신경 써서 기억해놓지 않으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잘못 해서 부모님한테 원망이라도 쏟아지면 정말 견디기 힘들다.
눈 수술을 얼마 전에 해서 체육 시간에 좀 조심해야 합니다. 공에 맞거나 모래가 눈에 안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체력이 조금 약해서 활동량이 너무 많으면 머리를 아파하고 많이 힘들어합니다. 여름이 특히 심합니다.
버드나무 알레르기가 있어요. 봄에 외출 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되는 날이 좀 있을 겁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이를 잘 이해하려면 직접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고 시간을 내어 아이 하나하나와 면담을 해보는 게 좋다. 하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요즘 그나마 이런 조사서가 있어서 약간 도움을 받는다. 많지 않은 정보지만 이 정도라도 잘 기억해서 아이들을 대하는 데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사하는데 시간을 내어준 부모님들께 고맙다는 말 전한다.
[덧붙임]
수학 시간에 큰 수 일 만(10000)에 관해 공부할 때였다. 일 만을 그림으로 나타내보자는 문제가 있어서 어떻게 할 지 의견을 들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돈을 떠올렸다.
“천 원짜리 열 장을 그립니다.”
“오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다섯 장을 그립니다.”
“오천 원짜리 두 장을 그려서 만을 나타냅니다.”
발표를 듣고 있던 성윤이가 불쑥 손을 들고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십 원짜리 천 개 그리면 돼요.”
이틀 동안 관찰해보니 성윤이는 장난 끼 넘치는 얼굴에 언제나 웃음이 가득했다. 발표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성윤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성윤이는 십 원짜리 천 개 그리도록 해라.”
아이들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이자 성윤이는 한 술 더 떴다.
“아니요. 일 원짜리 만 개 그릴건데요.”
“그래라. 안 그리기만 해봐라!”
내가 인상을 찌푸려도 성윤이는 또 싱글벙글 웃음만 내보였다. 저 청개구리 같은 장난 끼를 일 년 동안 어찌 감당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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