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1 교실일기

4월 11일 - 부끄러운 엄포

늙은어린왕자 2011. 4. 13. 00:12

 

4월 11일 비온 뒤 갬
부끄러운 엄포

 

  수학 시간에 2단원 단원평가를 하는데 정해진 시간까지 문제를 풀지 못한 아이가 다섯 명 있었다. 시험지를 보니 한두 문제에서 네 문제까지 남아있었다. 3분정도 시간을 더 주었더니 세 명이 풀어왔다.
  “다른 아이들은 시간 내에 풀었는데 너희들은 늦게 가져왔으니 벌점 5점은 줘야겠어.”
  아이들은 말없이 문제지를 내고 들어갔다.
  이제 두 명이 남았다. 쉬는 시간이라 교실이 시끄러웠다. 두 아이를 데리고 교사 휴게실로 가서 남은 문제를 마저 풀도록 했다.
  10분쯤 지났을까? 두 명 다 문제를 모두 풀어왔다.
  “고생했다. 근데 너희들은 벌점 10점은 줘야겠는 걸? 다른 아이들보다 10분 이상 더 풀었으니 말이다.”
  시험지 위에 벌점 표시까지 하면서 엄포를 놓았더니 둘 다 말없이 힐끗 보기만 하고는 교실로 갔다.
  두 아이가 교실로 간 뒤 시험지를 살펴보았다. 한 명은 추가시간에 푼 네 문제 가운데 두 문제를 맞혔고, 나머지 한 명은 네 문제 모두 틀렸다. 둘 다 끙끙거리며 풀긴 했는데 결과가 썩 좋지 않았다.
  만약 진짜로 벌점을 10점씩 주면 어떻게 될까? 두 문제를 더 맞힌 아이는 8점을 더 얻었지만 벌점이 들어가면 오히려 2점을 잃게 되고, 다른 아이는 아무런 소득 없이 10점만 잃게 생겼다. 시간을 더 주고 벌점을 주기 보다는 문제를 다 못 풀었더라도 차라리 다른 아이들 마칠 때 마치는 게 점수 면에서는 더 유리한 결과가 나왔다. 괜히 엄포를 놓았구나 싶었다.  
  오후에 평가지를 매겨보니 대부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엄포 보다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처럼 성적을 통지표에 올리는 시험이 아니라 단순한 단원평가일 뿐인데 무엇 때문에 시간을 칼 같이 지키도록 하고 뒤늦게 푸는 아이들한테 벌점까지 준다고 했을까. 
아이들을 통제 대상으로 여기는 나쁜 습관이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진짜 벌점은  문제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을 도와주려 하지 않고 괜한 엄포만 놓는 내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덧붙임] 요즘 카이스트의 '징벌 학점제도'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정해 놓은 학점이 안 되면 정도에 따라 돈을 매기는 방식이지요.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했지요. 이 제도가 문제라는 생각을 늘 가져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 시간에 시험지를 안 냈다고 벌점을 주려던 것도 똑같은 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점이 낮으면 벌로 돈을 더 내라고 한다는 것과 시간 내에 시험지를 안 내면 벌점을 준다는 건 닮음꼴 그 자체입니다. 둘 다 학생들을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총장님을 안 좋게 생각하고 비판도 했는데 이제 그 화살을 내 자신에게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