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가꾸는글쓰기/2014 교실일기

7월 4일 - 욕설쪽지 범인잡기

늙은어린왕자 2014. 9. 23. 18:10

욕설 쪽지 범인 잡기

 


2학년 꼬물이들의 특징을 들라면 첫째가 놀기를 좋아하고, 둘째는 고자질 하기 좋아하며, 셋째는 흥미로운 일이 생기면 다른 일은 제쳐 두고 그 일에 몰입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셋째 특징과 관련 있는 일을 한 가지 쓰고자 한다. (근데 정리하고 나니 좀 길다. 아니, 많~이 길다. 다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할 듯. 그때 그때 메모해놓은 걸 아까워서 버리지 못한 결과다.)

어제와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이슈를 꼽으라면 바로 '욕설 쪽지 범인 잡기'이다. 어제 오전에 무성이 책상에서 무성이를 욕하는 욕설 쪽지가 발견됐다. 무성이 바로 앞에 앉은 서진이는 이 사건을 제 일처럼 여기고 마치 수사관 처럼 공책에 정리했다. 서진이 수사기록(?)과 아이들 이야기를 종합해서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건이 일어난 때 : 2014년 7월 3일 오전
 2. 피해자 : 김무성
 3. 가해자 : 찾고 있음
 4. 피해내용 : 무성이 책상 서랍에서 욕설이 적힌 쪽지가 발견됨. 가로 7cm, 세로 3cm 크기의 기름종이에 무성이를 욕하는 욕설이 있음
 5. 욕 내용 : O발, O쌔기, 씨O, O끼, 병O, O시끼, 진짜병O, 니는 바보다, 무성이에게
 6. 무성이 상태 : 어이없어함.

아이들이 건네 준 쪽지를 보니 정말 욕설만 가득하게 적었다. 쪽지를 받은 무성이가 충격을 크게 받았을 것 같았다. 일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죄질이 아주 나빠보였다.

우리는 즉시 수사에 들어갔다. 먼저 할 일은 증거를 모으는 일이었다. 과연 가해자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남긴 증거는 쪽지 밖에 없다. 그리고 쪽지에 남긴 글씨와 맞춤법 정도이다. 내가 말했다.

"보통 욕할 때 '개새끼'라고 하지 '개쌔기', '개시끼'로 쓰지 않잖아? 이렇게 쓴 걸로 봐서 글자를 잘 모르는 아이가 범인일 것 같지 않니?"

나연이 의견은 달랐다.

"글자를 잘 알면서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잖아요."

재웅이도 같은 의견이었다.

"글자를 아는데 다른 사람처럼 보이려고 틀릴 수도 있어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럼 다른 단서는 없을까? 가영이가 말했다.

"무성이와 절친이 그랬을 수 있어요. 태권도에 같이 다니는 애 중에서 김한빈과 절친인 아이가 있는데 술래잡기할 때 절친을 먼저 잡아요."
절친이 배신하는 게 가영이에게는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아이들도 가영이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무성이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절친 중에 그럴 만한 아이가 없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경수가 의견을 내놨다.

"어떤 아이가 무성이한테 복수할려고 했을 수도 있어요."

나연이는 반대했다.

"무성이는 다른 사람한테 죄 지을 아이가 아니다."

무성이한테 다른 사람 원한 살 일을 했는지 물어보니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나연이 말이 맞았다.

"평소에 욕을 잘 쓰는 사람이 범인일 것 같아요."

말로 욕을 잘 쓰는 사람이면 분명히 글로도 쓸 테니까 본희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 반에는 평소에 욕 잘 쓴다고 신고 당한 아이가 없다. 이 때 성웅이가 새로운 의견을 냈다.
"수학 방과후 하는 사람 중에 무성이와 아는 친구가 있을 수도 있어요. 우리 반에서 수학 방과후를 하니까 수학 방과후 아이가 범인일 수도 있어요."

나연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쉬는 시간에 범인이 우리 반에 와서 무성이 자리를 확인하고, 무성이가 필통이 두 개라서 빨간 필통을 책상 안에 넣어놓고 다니는데 범인이 방과후 시간에 공부하는 척 하며 써서 필통에 넣었을 것 같아요."

무성이 필통이 두 개인 것을 아는 걸 보면 나연이는 무성이를  끔찍이 위하는 듯하다. 어쨌든 분위기는 방과후 수학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가 범인이라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가영이가 반대 의견을 냈다.

"무성이 자리에는 3학년만 앉는다."

가영이 말은 힘이 있었다. 가영이는 수학 방과후를 다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방과후 아이들에 관해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저가 글씨 보니까 여자 글씨 같기도 하고 남자 글씨 같기도 한데 여자 글씨 확률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코로 냄새 맡아보니까 화장품 냄새가 났어요. 화장품은 여자가 쓰니까 여자가 범인이에요."

준민이가 나름 관찰한 결과를 소개하자 잠시 소란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우르르 반대했다. 2학년들이 무슨 화장품을 바르느냐?, 남자도 화장품 쓰는 아이가 있다, 종이 자체에 화장품 냄새 나는 것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준민이는 멋쩍게 입을 닫았다.

이야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글자를 잘 모르는 아이인지, 절친인지, 원한 관계에 있는지, 평소에 욕을 잘 쓰는 아이인지, 방과후 수업을 듣는 아이인지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추리는 계속됐다. 
"점심 시간 때 다른 애들은 쉬는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그 때 다른 반 아이가 무성이 자리를 파악하고 그랬을 것 같아요. (민채)

"학교 마치고 방과후 하는데 욕을 잘 쓰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가 의심돼요." (준현)

"학교 마치고 방과후 할 때 무성이를 아는 형아가 있는데, 무성이 자리에 걸려 있는 소고에 이름을 보고 무성이 인지 아닌지 알고, 전에 무성이가 죄 지은 것을 복수하려고 그랬을 것 같아요." (본희)

이제 다른 반, 다른 학년 아이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어서 특정 장면을 떠올린 사례도 나왔다.

"어제 인형 가지러 왔을 때 2학년인가 3학년이 무성이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재웅)

"돌봄 교실에 갔다 와가지고 실내화 갖다 놓으려고 하는데 무성이 자리에서 어떤 애가 종이를 떼가지고 뭘 쓰고 있었어요." (준현)

사실인지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뭔가가 손에 잡힐 듯하다. 그러나 역시 증거가 없는 게 문제다. 아이들 말대로 감시카메라만 켜놨어도 쉽게 잡았을 텐데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아이들은 또 추리를 이어갔다.

"1반 아이 중에 우리반에 문을 발로 차고 욕 쓰고 해서 도망가서 1반이 범인일 것 같아요." (나연)

"옛날에 1반에서 여섯 번 일곱 번 와서 문을 차고 미친 새끼라고 한 아이가 있었어요." (도은)

"우리가 점심 먹으러 가고 없을 때 1반에 무성이를 아는 애가 있다니까 그 애가 와가지고 했을 것 같아요." (본희)

불똥은 이제 특정 반으로 튀었다. 2학년 1반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우리 반 바로 아래층에 있다. 계단은 우리 반과 1반 아이들의 유일한 쉼터요 뒷골목이다. 아이들 말에 따르면 1반은 평소에 계단에서 우리 반과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다. 아이들은 그 동안 묵은 감정을 쏟아냈다. 다빈이도 마찬가지다.

"2학년 1반 애인가 모르겠는데 다섯 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가 있는데 어떤 애가 친구한테 종이에다 욕을 써가지고 나눠주고 그랬어요."

경수도 1반을 의심했다.

"OOO과 1학년 때 같은 반인데 완전 깡패였어요. 우리를 때리고 욕 하고 해서 그 녀석이 의심돼요." 

급기야 재웅이는 욕설 쪽지가 1반 종이랑 비슷하다고 하고, 진우는 1반 교실 안에 비슷한 종이가 있었다는 목격담도 내놨다. 그런데 1반 종이가 도대체 뭔지 나는 궁금했다. 아이들은 국어활동 부록에 비슷한 종이가 있다며 1반 아이들 책을 검사해보자고 했다. 종이가 찢어진 아이가 범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확인해보니 두께가 달랐다.

종이 논란이 마무리될 즈음 본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 아이가 다른 종이에 또 욕을 써서 할 수도 있어요. 기다려봐야 돼요."

처음부터 수사관 노릇을 하던 서진이가 맞장구쳤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재웅이도 거들었다.

"엄마가 욕을 쓰는 사람은 계속 욕을 쓴다고 했어요. 또 욕을 쓰는 사람을 잡으면 돼요."

여기서 이야기를 끊고 내가 사건을 정리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증거가 없다. 서진와 본희, 재웅이 말대로 범인은 다시 현장에 나타나거나 같은 일을 저지른다. 그래서 이 시간 이후로 그런 아이가 있는지 잘 살펴보자."

아이들은 점심 시간에 밥 빨리 먹고 교실을 감시하기로 했다. 나더러는 급식 가는 시간도 앞당기자고 부탁했다. 나는 그러자고 했다.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띄었다.

점심 먹고 오니 준민이가 후다닥 달려왔다.

"선생님, 1반에 두 명은 범인이 아닌 것 같아요. 살펴보니 점심 시간 때 딱지 접는다고 내내 교실에 앉아 있었어요."

준민이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특별한 제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는 둥 요란 떤 것에 비해서는 수사결과가 밋밋했다. 점심 빨리 먹고 모두들 껍쌓기나 딱지치기에 빠진 게 분명했다.

이렇게 욕설 쪽지 사건이 시들해질 무렵 아이들이 물었다. 
"제티 사건은 어떻게 할 거예요?"

제티사건이란 그제(7월 2일) 본희가 책상 위에 놓아둔 제티가 없어진 사건이다. 아이들이 흰 우유를 못 먹겠다고 해서 희망하는 사람은 매주 수요일에 제티를 타서 먹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때 가져온 제티가 없어진 것이다. 만약 범인이 자수하면 용서해주고 자수하지 않으면 앞으로 제티를 못 먹도록 했는데, 범인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내가 말했다.

"범인은 다시 현장에 나타난다. 제티도 다음주에 또 먹으려고 할 거다. 다음 주 수요일날 제티를 가지고 와서 책상 위에 두자."

사건 이후로 제티를 못 먹게 해서 은근히 마음에 걸렸는데 자연스럽게 허용 수순을 밟았다. 아이들은 환영했다.

하루가 지나고 오늘 아침, 잊어버린 줄 알았던 욕설 쪽지 사건에 관해 새로운 제보가 들어왔다. 욕설쪽지를 받은 아이들이 다른 반에도 몇 명 더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 말이 맞았다. 범인이 같은 일을 또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증거가 없으니 사건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범인이 다시 나타난다고 했잖아요? 근데 안 나타나요."

어제부터 잠복근무에 열중하던 재웅이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모양이다.

"좀 더 기다려보자. 범인은 반드시 나타날거야."

점심 무렵, 아이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7월 28일에 범인이 온대요. 왜냐하면 우리가 2학년이잖아요? 그러니까 2이고, 2학년이 8반까지 있잖아요? 그러니까 28일에 나타날 것 같아요."

증거가 없으니 미신(?)을 믿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어쩌나? 7월 28일은 방학 중인데... 아무래도 이 사건은 풀지 못하는 사건, 즉 '미제사건'으로 남을 듯하다. 앞으로도 수사는 계속되겠지만 반짝 몰입하는 2학년 특성상 진득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을 듯하다. 피해자인 무성이는 욕설 때문에 상한 마음은 벌써 날린 듯하고, 여러 아이들 관심과 노력 덕에 이미 사건을 즐기는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7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