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사라졌다
점심 시간 끝나고 4교시 수업 시작하는 시각,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 토끼똥(이상 가명)이 사라졌다.
"얘들아, 녀석들 어디갔니?"
몇몇 아이들은 이미 녀석들의 동태를 알고있었다.
"놀이터에 있을걸요?"
더 확실한 제보도 들어왔다.
"너구리 기다린다고 밖으로 나갔어요."
너구리라면 오키나와를 지나 제주도를 스치고 일본으로 간다는, 세력도 강한 7월 태풍! 녀석들은 대동강 물도 판다던 김삿갓 거짓말을 남겨놓고 사라진 것이다.
"뭐라? 너구리 만난다고!"
나는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숨소리가 후지직후직 너구리 바람같은 소리를 내며 놀이터쪽 복도 창가로 달려갔다.
세상에나! 저 멀리 녀석들이 있었다. 텅빈 운동장 가 철봉 모래밭에서 녀석들은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너구리 기다린다더니, 하다못해 부채라도 하나씩 들고 바람 쫓을 생각 않고 저렇게 태평이라니!
"얏! 너희들 뭐햇! 얼른 들어왓!"
내 얼굴보다 작은 창문에 한쪽 눈과 입을 내밀고 소리치자 목소리는 며칠 전 하늘을 울린 천둥처럼 아파트와 학교 벽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운동장을 울렸다. 녀석들이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봐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느릿한 녀석들 몸짓으로 보아 '저건 또 뭐꼬?' 하는 모습이 뚜렷했다.
녀석들을 발견하는데 5분, 느적느적 슬렁슬렁 움직이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이끌고 녀석들이 들어오는 데 5분! 합해서 1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칠판 앞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섰다.
잠시 녀석들을 훑어보니 '언제나 꾸러기'들만 모였다. 모두 공부시간은 최대한 늦추고 마치는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악동클럽' 회원님들!
녀석들 얼굴과 몸은 땀으로 뒤범벅됐고, 손발과 바지끝에서 모래알갱이가 장맛비처럼 부시르륵 떨어졌다. 나는 올빼미 눈을 하고 물었다.
"누가 너구리 만나러 가자캤노?"
" ..... "
녀석들은 힐끗힐끗 서로 눈치만 볼 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흠, 제대로 찔렀다. 나는 볼살을 실룩실룩 아래위로 흔들며 물었다.
"놀이터 시계 보면 아, 공부 시간이구나 알텐데 왜 들어올 생각 안했노?"
또 반응이 없으면 먹이찾아 굶주린 독수리 눈으로 녀석들을 다그칠 참이었다. 이걸 눈치챈 개똥이가 부시시 입을 열었다.
"애들이 놀고 있어서요."
소똥이도 같은 대답을 했다.
"애들이 안 들어가고 있어서요."
말똥이와 토끼똥도 똑같이 대답했다.
"머시라? 운동장엔 너희 네 명이랑 다른 꼬맹이 둘 밖에 없었는데?"
" ..... "
녀석들은 다시 입을 닫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콕 찔렀다. 그러니까 개똥이는 소똥이가 놀아서 놀고, 소똥이는 개똥이가 안 들어가서 안 들어가고, 말똥이도 그렇고 토끼똥도 그렇고, 이렇게 돌려막기 하겠다는 심보렸다!
"안 되겠군. 벌을 줘야겠어. 흠... 근데 어떤 벌을 줘야하나?"
안타깝게도 이럴 때 줄 마땅한 벌이 없다.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말로 타이르기만 하면 안 하겠다고 해놓고 돌아서면 깜깜하게 잊어버리는 녀석들 아닌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공격했다면 알밤이라도 한 대 콩 쥐어박으련만!
"좋다. 친구들 의견을 들어보겠어. 친구들이 하자는 대로 할 테니 꼼짝말고 서 있어들!"
여태껏 드기만 하던 아이들이 슬슬 몸을 풀었다. 녀석들은 슬그머니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내 편인걸. 나는 턱을 당기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얘들아. 얘들을 용서할까?"
"아니욧!"
그럼 그렇지. 이렇게 기를 팍 잡아놔야 녀석들으 저항이 사라진다.
"그럼 어떤 벌을 줘야 얘들이 또 이러지 않을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손이 올라왔다.
"앉았다 일어섰다 백 번 하기 시켜요."
"밖에 두 시간 동안 세워둬요."
"운동장 스무바퀴 뛰게 해요."
무시무시한 벌이 나오자 녀석들 표정이 햇빛에 말려놓은 무말랭이처럼 오그라졌다.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 발표는 줄을 이었다.
"엄마한테 문자보내요."
"1층에서 5층까지 다섯 번 오르락내리락 해요."
"반성문 20장 쓰게 해요."
나는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녀석들에게 한 마디 했다.
"잘 들엇! 지금 얘기하는거 하나하나 차례대로 벌 줄거얏!"
녀석들은 휘몰아치는 벌 태풍 앞에 제대로 기가 죽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만 오물오물 할 뿐 말이 없었다.
'이게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던 너구리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눈을 깔았다. 녀석들은 한 마디로 케이오(KO) 직전이었다. 그러나 아직 올라온 손이 남았다. 마저 듣기로 했다.
"일부터 천까지 적기 해요."
다시 무시무시한 벌이 나오자 앉은 아이들도 놀랐는지 녀석들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 때, 여태 잠자코 있던 말똥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나는 숫자 몰라요!"
맞는 말이었다. 얘들은 아직 100까지 밖에 안 배웠다. 어제 편지 봉투에 주소 쓸 때도 '오백육호'를 어떻게 쓰냐고 묻곤 했다. 그런데 어떻게 천까지 적냐는 말이다. 저항이었다. 아이들이 술렁였다.
"1층에서 5층까지 20번 해요."
"헐~"
이번에는 토끼똥이 어이없다는 소리를 냈다. 또 저항이었다.
"밖에서 무릎꿇고 손들기해요."
"벌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이 혼난다."
개똥이와 소똥이도 저항에 동참했다. 녀석들은 벌 태풍에 정면으로 맞섰다.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이 때 민채에게 사랑고백 한 남자 3인방 중 한 아이가 소리쳤다.
"여자 한 명씩과 뽀뽀하게 해요!"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신성하던 법정드라마가 막장드라마로 변해버렸다. 태풍은 어느새 달콤한 산들바람이 되었다. 저항도 사그라졌다. 빨리 분위기를 수습해야 했다.
"자~자~ 그만! 그만!"
진정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나는 힘떨어진 턱근육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럼 여태껏 나온 벌칙에 따라 벌을 주겠다. 첫번째 벌은 앉았다 일어섰다 100번이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벌써 옆 아이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나누는 아이도 보였다.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은 시간도 없고 또 100번은 너무 많은 거 같다. 세일 많이 해서 20번만 하겠다. 자, 여기 한 줄로 서라."
녀석들은 기세등등하게 벌을 받았다.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하나, 둘, .... , 열아홉, 스물!"
바람 불고 장대비 휘몰아칠 듯하던 교실은 어느 새 더위로 가득 찼다. 오사카를 지나 제주도를 스쳐 일본으로 간다던 태풍 너구리도 힘이 뚝 떨어졌다.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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