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목요일 엷은 구름 조금
말없이 아이들 인솔하기
지난 주말부터 몸이 안 좋고 감기 기운이 오르내리더니 기어코 어제 낮부터 머리가 아프고 몸살이 덮쳤다. 두통과 몸살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목이었다. 어제 저녁부터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정말 큰일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문화축제에 가는 날이 아니었던가. 야외 학습에 아이들을 인솔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니... 비극이었다.
아이들을 누구에게 맡겨볼까 생각했는데 유일하게 시간이 되는 교무 선생님은 임신 중인 옆 반 선생님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이미 약속해놓았다. 기댈 구석은 오로지 우리 아이들 밖에 없었다. 걱정은 컸지만 아이들을 믿고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우선 TV에 컴퓨터 화면을 띄우고 할 말을 적었다.
‘선생님 감기로 목소리가 안 나옴. 오늘은 모든 설명과 지시를 글자로 합니다.’
아이들은 무뚝뚝하게 앉아 있는 나와 TV를 번갈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 △△상 자리에 앉아라.’
글자가 나가자마자 ○윤이와 △상이가 자리에 앉았다. 말로 하면 두세 번 반복해야 할 것을 글자로 한 번에 해결했다. 말 못하는 글자가 묘한 힘이 있구나 싶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출발은 9시 30분. 해반천에서 배 타고 조별로 움직임.’
아이들은 TV에 나타나는 글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빛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거 재밌어요.”
앞에 앉은 말괄량이 여학생들은 내 속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오히려 즐거워했다.
몇 가지 할 말을 이렇게 전하고 아이들을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컴퓨터 대신 쓰려고 책 크기만 한 흰색 보드마커용 칠판을 하나 챙겨나갔다.
이제 자판 대신 보드마커로 글자를 써서 할 말을 전했다.
‘남학생들 줄 빨리 서시오.’
운동장에 나가자마자 이렇게 써서 머리 위로 올려주었더니 남학생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줄을 맞췄다. 평소에는 말 안 듣기로 소문난 개구쟁이 녀석들이 글자 몇 개에 후다닥 줄 맞추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느 새 몸살과 목 아픔이 몸에서 사라진 듯 했다.
‘야외라고 걷다가 함부로 방귀 뀌지 않기. 뒷사람이 괴로움.’
해반천에 다다랐을 때 짓궂은 문자를 들어보였더니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선생님이나 조심하세요.”
“선생님 방귀는 방사능 보다 지독하잖아요.”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어느덧 선착장에 다달았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 모두 배를 한 번씩 타고 행사장 들머리에 모였다. 여기까지는 함께 움직였지만 이제 조별로 움직일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적어서 보여주었다.
‘지금부터 조별로 움직이면서 체험하기. 다시 모이는 시각은 11시 50분. 이 자리에 모임.’
아이들은 신나게 갈 길을 갔다. 나는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마주치는 조가 있으면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이들은 모이는 시간에 정확히 제 자리에 모였다. 몸이 안 좋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걱정이 컸던 하루였는데 아이들이 도와준 덕에 무사히 보냈다.
“얘들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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