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0일 화요일 구름 조금
마음을 녹인 두 편의 글
지난 주 토요일 날 남녀 대결로 오징어놀이를 했을 때 서로 시비가 붙어서 욕설과 주먹이 오고 간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 벌칙으로 방학 전까지는 교실에서 체육수업을 한다고 일러두었다. 오늘 체육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쏟아냈다.
“진짜 안 나가실 거예요?”
“밖에서 하죠?”
“나가요, 제발.”
보통 때라면 아이들이 이렇게 애걸할 때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넘어가주는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계속 물어보기에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안 나간다. 반성도 전혀 없고 또 그런 일이 생기는 걸 어떻게 봐주겠니?”
일단 내 입에서 말 꺼내기에 성공하자 아이들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우리 반성하고 있어요. 얘들아, 그렇지?”
“네, 얼마나 반성하고 있다고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 남학생 몇 명이 아양을 떨었지만 나는 결정을 바꾸어주지 않았다.
“그럼 체육시간에 뭐 하실 거예요?”
“뭐하긴, 공부해야지.”
“…‥.”
아이들은 실망한 듯 투덜대며 자리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안 돼 보였지만 벌칙은 벌칙이니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는 아이들에게 양면에 글 한 편씩 담은 종이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한 쪽에는 혜민이가 쓴 <원숭이 장갑>을, 다른 쪽에는 채미가 쓴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글을 실었다. 둘 다 어제 쓴 글이다.
사실 어제는 요즘 글쓰기가 성의 없다며 잔소리를 해서 아이들에게 미안한 날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칭찬도 하고 마음도 보듬어주려고 어제 쓴 글 가운데 두 편을 골라 미리 인쇄해둔 것이다.
원숭이 장갑
어제 아침에 내가 TV를 보고 있는데 언니가 나를 향해 비닐봉투를 던졌다. 나는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안을 보니 장갑이 있었다. 근데 나는 장갑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난 언니한테
“이게 뭐야?”
라고 하니 언니가 원숭이 장갑이라고 했다. 난
“이게 무슨 원숭이야. 팔, 다리는 숏다리에다가 얼굴은 원숭이 같지 않구만!”
이라고 했다.
그 때 엄마가 방에 들어왔다. 난 엄마한테
“엄마, 이게 뭐 같아?”
라고 하니 엄마가 양말이라고 해서 난
“장갑인데, 언니가 원숭이 장갑이래.”
라고 했더니 언니가
“뭐? 양말?”
이라 했다. 나랑 엄마는 웃었지만 언니는 웃지 않았다.
그래도 언니는 고마웠다. 그렇지만 진짜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의껏 끼고 다니기로 했다.
장갑 안을 보니 솜이 가득 있었다. 까보니 따뜻했다. 겉은 마음에 안 들어도 속은 따뜻했다. 난 언니가 계속 날 챙겨주면 좋겠다. (12월 19일, 이혜민)
크리스마스 선물
어제 점심쯤에 할머니가 나에게
“크리스마스 때 뭘 사줄까?”
하고 물어보셨다. 나는
“할머니, 그럼 책 사 주세요.”
라고 하니 할머니가
“그래, 알았다.”
라고 하셨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오후 4시쯤에는 엄마가 나에게 와서
“크리스마스 때 뭐 사줄까?”
라고 했다. 나는 책 한 권이면 충분한데 엄마가 더 사준다고 하니까 저번부터 갖고 싶었던 하얀 티셔츠를 사달라고 했다. 그러니 엄마가
“응, 이번 크리스마스 때 티셔츠 사 줄게.”
라고 했다. 이번엔 엄마 덕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저녁 때 밥 먹기 전에 경주에 있는 아빠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아빠, 잘 지내고 있어?”
“응, 채미야. 이번 크리스마스 때 뭐 사줄까?”
난 순간 당황했다. 할머니와 엄마께 갖고 싶은 것을 다 말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은 가지고 싶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빠가 신경 써서 사준다고 하는데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아빠! 아빠가 기대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홈플러스에 있는 거 다 사줘! ㅋ”
라고 했다. 그러자 아빠가
“아빠, 그렇게 많은 돈 없어.”
라고 하셨다. 나는
“아빠, 홈플러스 가서 보고 고를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기대가 많이 된다. (12월 19일, 손채미)
앞자리에 앉은 아이들에게 글을 낭독하게 하고 우리는 조용히 눈으로 따라 읽었다. 따뜻한 글 분위기가 영향을 주었는지 조금 전까지 흥분하던 남학생들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감상했다.
글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니 잘 썼다, 부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두 글에는 따뜻한 마음이 들어있지요. 두 사람은 이런 장면을 놓치지 않고 글로 잘 썼습니다. 근데 만약 이것을 글로 쓰지 않았으면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을 거예요. 물론 두 사람도 그냥 지나쳤을 거고요. 그러면 아무 일이 아닌 거지요. 글은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잠자코 들었다. 글 두 편이 아이들의 마음을 가라앉힌 셈이다. 내 마음을 짓누르던 불만도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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